1776년 봄 대륙회의 대의원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미 독립을 논의하고 있을 때 토마스 제퍼슨은 버지니아 몬티첼로의 자기 집에 머물고 있었다. 첫째 이유는 아내 마사가 아팠고 둘째는 회의장의 소란함보다 전원주택의 조용함을 원했기 때문이다.
또 3월말에는 오랫동안 소원한 관계이던 모친이 사망했다. 그 직후 한 달 동안 제퍼슨은 극심한 편두통에 시달리며 이는 죽을 때까지 스트레스가 심할 때면 돌아와 그를 괴롭힌다. 마침내 5월이 되어서야 그는 필라델피아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당시 상황은 영국과 전쟁을 벌인지 1년이 넘어섰고 그해 초 나온 토마스 페인의 ‘상식’(Common Sense)이 주민들의 마음을 완전히 바꿔놓아 독립은 기정 사실화돼 있었다. 단지 ‘독립 선언서’를 누가 쓰느냐 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마지막 후보로 존 애덤스와 토마스 제퍼슨이 지목됐다. 애덤스는 제퍼슨보다 9년 연상으로 독립운동을 처음부터 주도했으며 명성으로나 업적으로나 제퍼슨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버지니아 출신 대의원으로 최연소인 제퍼슨은 명문 처가 덕에 가까스로 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애덤스는 그에게 자리를 양보한다. 우선 13개 식민지 중 주도적인 위치에 있던 버지니아 대표가 이를 쓰는 것이 옳고 “나보다 10배나 글을 잘 쓰는” 제퍼슨이 맡는 것이 온당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또 급박한 전황 등 시급한 과제가 산적한 당시 상황에서 누가 이를 쓰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겨졌다.
이렇게 하여 ‘독립 선언서’는 33살 먹은 제퍼슨의 손에 의해 이틀 만에 쓰여지게 된다.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자유, 행복 추구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국민은 이를 어기는 정부를 뒤엎을 권리는 갖는다’는 독립 선언서의 메시지는 로크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지만 최근에는 인간의 도덕성을 중시하는 스코틀랜드 계몽철학자 프랜시스 허치슨의 사상이 들어 있다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제퍼슨의 초고를 받은 대륙회의는 세 부분에 걸쳐 수정을 가한다. 하나는 미국의 노예제가 영국 왕 탓이며 이제 노예를 해방해 식민지인을 압박하려 한다는 부분, 둘째는 미국 식민이 처음부터 영국 정부의 도움 없이 국민들의 힘만으로 이뤄졌다는 부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국을 배신한 영국 국민과 영원히 절교한다는 부분이다.
제퍼슨은 죽을 때까지 이를 섭섭해 했지만 모두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거나 불필요한 감정적 발언들이다. 이런 수정을 통해 말끔히 다듬어진 독립 선언서는 “위원회가 고쳐 개선된 유일한 예술 작품”으로 불리기도 한다.
4일은 대륙회의가 독립선언서를 채택한 지 231주년이 되는 날이다. ‘미국민의 성서’ ‘독립 선언서’와 그 예언자 토마스 제퍼슨의 꿈은 아직도 미국인의 꿈으로 남아 있다. 보수파나 리버럴 모두 자신들이야말로 그 정통 후계자임을 자처한다. 독립 기념일을 맞아 제퍼슨과 ‘독립 선언서’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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