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평양사범대 러시아어 교수 김현식. 그의 회고록이 출간됐다. ‘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 책 제목을 읽고 그가 지난 온 삶을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기분으로 회상하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통한의 외침이며 눈물로 적은 글이다.
평양과 모스크바, 서울, 그리고 워싱턴. 삶의 방향이 달라질 때마다 한국의 역사와 세계사도 뒤틀리고 있었고 그 한복판에서 김 교수는 자의든 타의든 처절한 이념적 투쟁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1992년 국립 러시아사범대학 교환교수로 있던 그가 누님을 만날 줄은 몰랐다. 남한의 정보요원을 통해서였다. 누님은 말했다. “너를 위해 40년간 새벽마다 기도했다. 시커멓게 멍든 무릎을 봐라. 너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목사가 돼야 한다고 유언하셨다. 한국으로 가자...” 누님은 현식이가 목사가 돼 북한의 개방과 선교를 위해 남은 인생을 바칠 것을 설득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아내와 아들과 딸, 다섯 명의 손주, 자신을 보증 선 7명의 제자들을 생각하면 절대 안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한 정보요원과 접촉한 사실을 안 북한 측의 귀국 명령은 김 교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린다. 급한 호출은 그가 이미 처단 대상이라는 의미였다. 결국 북에 남아있는 가족과 제자들의 안전 보장을 위해 신상 비공개를 약속받고 망명을 결심한다.
KGB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비밀 수송 작전으로 6개월 만에 남한에 도착하지만 생각대로 풀려가는 일은 없었다. 그의 삶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신분을 언론에 공개해야 한다는 정보요원, 지켜지지 않은 교수직 임용 약속, 아무 효용도 없는 주체사상이 판을 치는 한국사회... 하루 하루가 절망이었다. 그는 수많은 ‘탈북자’ 가운데 하나로 전락해 있었다.
김 교수를 구렁텅이에서 구출한 것은 집필 작업이다. 뉴올리언스 신학대학원에서 1년간 초빙 교수로 있을 때 저술한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미국서 화제가 됐다. 이 책은 공산주의 유물론에 젖은 북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풀어 쓴 성경이다.
예일대학서 그를 초빙교수로 받아들이며 그의 삶은 또 한 번 반전된다. ‘원쑤’의 나라에서 3년간 북한학을 강의했다. 그 후 ‘탈북자 김현식’에서 통일교육원 강연자 명단의 첫 자리에 오른다. 이 책은 그가 예일대학에 머무를 때 틈틈이 썼다. 반혁명 수령 배신자의 가족으로 몰려 처형당한 아내와 아들, 며느리, 두 딸, 다섯 손주에게 바치는 책이다.
사범대학 교수로, 최고위층 가정교사로, 북한 교육제도 개혁자로, 교육 이론가로 40년을 보낸 노 교수의 눈에 비친 북한의 실상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김정일은 한 때 이마에 땀을 송글 송글 맺으며 러시아어 구답 시험을 치르던 소년이었다’ ‘북한에서도 대학에 들어가면 군대를 가지 않고 육체 노동에서도 제외되기 때문에 진학 경쟁이 치열할 뿐 아니라 입시 부정으로 몸살을 앓는다’ ‘북한의 외국어 교육은 말할 수 있게 하는 교육으로, 유학이나 해외연수 한 번 없이도 졸업과 동시에 해외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실력이 갖춰진다’ ...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른 세상인 남한에 와서 겪은 웃지 못할 해프닝도 가감없이 적고 있다. 청첩장을 ‘첩이 보내는 초대장’으로 오해하고, ‘고희’의 고(故)‘가 죽은 사람인 줄 생각하고, 한식은 찬 음식이며, 자부는 ‘잡부‘로 알아듣는 등 언어 박사의 새말 배우기 노력은 희화적이다.
그의 신앙은 유년주일학교 교사였던 최순직 목사를 1998년 다시 만나면서 다시 자라게 된다. 현재의 아내도 큰 힘이 됐다. 뉴올리언스 초빙교수 시절이던 2001년 미국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남은 생을 북한 선교를 위해 바치기로 결심한 노 교수는 통일이 되는 날, 칠판과 백묵을 가득 싣고 북으로 달려가 제자들을 다시 만날 날을 꿈꾸고 있다.
김영사 간. 440쪽.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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