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대 언덕의 김일성 동상을 참배하는 북한인들.
CIA, 1968년 작성 ‘1급 비밀’문서 39년만에 해제
김일성 북한 주석은 1960년 4.19 혁명과 이듬해 5.16 군사정변 당시 남한에 지도급 남파간첩 50명만 침투돼 있었더라면 적화통일이 가능한 ‘황금기회’(Golden Opportunity)를 놓쳤다고 굳게 믿고 1965년 9월 일본 조총련 간부들에게 앞으로의 그 어떠한 ‘정변’(Coup)도 친북한 집권 세력이 들어서도록 변형시킬 수 있는 북한 노동당 지하당을 남한에 구축할 것을 직접 지시한 사실이 최근 기밀 해제된 미 중앙정보국(CIA) 보고서에서 드러났다.
CIA가 1968년 11월26일 작성, 39년간 ‘1급 비밀’(Top Secret)로 분류됐다가 지난 2일 기밀
해제 공개된 ‘김일성의 새로운 군사적 모험주의’라는 재목의 보고서는 한국전쟁 이후 국군과 미군과의 무력충돌을 피해온 북한이 1968년 김신조 등 무장간첩을 남파해 청와대를 습격하고 미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하는 등 도발적 행위를 잇달아 저지르자 그 배경과 목적을 정밀 분석한 것으로 북한의 ‘남한 파괴 정책’을 조명한 부분은 ‘평화통일’(Peaceful Unification)이라는 위장 구호를 내세워 남한에 친북 정권을 수립, 적화통일을 이루겠다는 김일성의 야심과 구체적인 계획이 상세히 수록돼 있다.
보고서는 “북한은 1953년 휴전 이후 수년간 ‘비무장지대’(DMZ)에서의 ‘괴롭힘’(Harassment) 정책과는 별도로 정보 수집과 반정부 남한인들 포섭을 목적으로 남한에 간첩망을 구축하는 ‘서서히 끓는’(Low-boil) 장기적 대남 파괴 공작을 펼쳐왔다”며 “이러한 정책은 소위 ‘평화통일’이라는 붉은색의 속임수 아래 이행됐으나 그 ‘평화통일’의 참뜻은 전쟁
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남한을 점령한다는 것으로 진정한 양상은 바로 혁명과 공작에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그 예로 1963년 2월21일 북한 간부가 비공개 석상에서 조총련 선전책임자들에게 남한의 평화적 혁명에 대한 관념을 비방하며 “혁명에 대한 우리의 역할은 남한에 주관적인 세력, 핵심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평화적 혁명은 불가능하다. 반동들은 혁명을 일으키는 기본 정책으로 평화적 공존을 선택했다. 만일 그들이 옳다면 언제 코리아가 통일이 되는가? 영원히 안 된다. 필요한 것은 스탈린의 말 그대로 ‘폭력, 폭력 그리고 더 많은 폭력’이다”라고 말한 사례를 들었다.
보고서는 이어 북한은 ‘서서히 끓는’ 대남 파괴 공작 정책에서 벗어나 1965년 4월부터 북한 전역에 도급 전투 훈련소를 마련하고 남한에서 ‘유격전’(Guerrilla Warfare)을 벌일 높은 능력을 갖춘 인물들을 선별, 훈련하기 시작했고 (정보 출처가 삭제된) 첩보에 따르면 “김일성은 1965년 10월초에 도급 관리들과의 회의에서 “1970년까지 남한을 정복하기 위한 오래된 노력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 유격대원들은 남한에서 반드시 (월남전에서) 베트콩들이 사용한 유격전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교시한 것으로 보고됐다”며 “1966년 3월 중순에 들어 (특정) 남한 마을 습격을 위한 유격대 특수 훈련이 시작됐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 같은 준비와 병행해 김일성은 남한에 신뢰할 수 있고 훈련된 정치 간부들을 정착시키는 노력을 강화할 계획을 마련했다”며 “이 간첩망에 대한 그의 기본 전략은 정보원을 포섭하고 결국 그 어떠한 반정부 정변도 친평양 권력 쟁취로 이끌 수 있는 강경파 공산당들을 남한에 고정시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이와 관련, “김일성은 1965년 9월30일 일본에서 남한에 공산당 간첩을 침투시키는 평양 지휘하의 코리안 연맹인 ‘조센 소렌’(조총련) 간부들에게 ‘만일 폭동을 제대로 계획하고 지휘할 강경파 마르크-레닌주의자 50명만 있었다면 남한에서의 혁명은 1960년 4월 또는 1961년 5월 이뤄질 수 있었다. 남한에는 수천명의 혁명가들이 있지만 마르크-레닌주의가 철저히 주입된 사람은 50명이 안된다”며 “오늘날 조센 소렌의 가장 중대한 임무는 남한에 (북한) 공산당 기관을 확립하기 위한 마르크-레닌주의자들을 침투시키는 것’이라고 교시했다”고 전했다.
보고서는 이외에도 “김일성은 1960년과 1961년 서울 정변을 이기적으로 이용하지 못한 것을 ‘황금 기회’를 놓친 것으로 믿고 있다는 상당한 증거가 있으며 1961년 9월11일 (개최된 제4차 조선노동당대회에서 남한에 ‘4.19’라는 혁명적 정세가 조성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남한혁명으로 유도하지 못한 근본요인이 남한에 혁명을 지도할 혁명적 당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남한 내 혁명당·지하당 구축을 강조한) 연설 이후부터 남한에 효율적인 북한 노동당 비밀 지부 확립을 추진해 왔다”며 “그는 남한에 이 같은 기구가 확고히 자리 잡기 전에는 남한 정복이 가능한 그 어떠한 기회도 없을 것으로 믿고 있는 듯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보고서는 이어 김일성이 1966년 3월 중순 평양에서 일본공산당 대표 미야모토에게 “우리 당은 지금 남한에 비밀리에 당 기구를 설립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기구가 우리가 계획한 규모로 확산될 때 새로운 변화가 일 것이고 이는 코리아에서의 혁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며
“우리는 그 시기를 1968년 후반 또는 1969년 초반으로 계산하고 있다”고 말한 사례와 1966년 4월 북한의 대남공작을 총괄한 조선노동당 연락부에게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지도자들을 훈련시켜 남한의 목표지역에 침투시켜야 한다”고 지시한 사례를 강조했다.
보고서는 역시 정보 출처가 기밀 해제되지 않은 첩보를 인용, 김일성이 조선노동당 연락부에게 “모택동은 ‘긴 행군’(Long March) 시기에 불과 100명의 진정한 지도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일 우리는 남한에 50명만 있다면 혁명을 이룰 수 있다”며 “심지어는 호남 지역
에 3~4명, 서울 지역에 3~4명 그리고 다른 지역에 비슷하게 해서 잘 훈련된 20명으로도 충분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반드시 그들을 올해 또는 아무리 늦어도 내년에 침투시켜야 한다”는 지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A4 용지 4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의 이 보고서는 북한의 ‘남한파괴 정책’에 대해 “북한 지도자들은 비록 언젠가 이뤄질 통일을 향한 실용적인 정책에서 ‘남한 행군’(March South)을 계속 배제 시킬 것이지만 그들은 분명히 지방에 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유격대원들의 침투를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기지를 확립하는 확률은 그 다지 높지가 못할 것”이는 결론을 내리고 그 이유로 “대다수 한국인들의 공산당에 대한 반감”과 “한국정부의 대 반란활동 증진”을 들었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지난 1974년 광복절에 육영수 여사가 저격 피살된 문세광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정부에 조총련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남한에 간첩을 침투시키는 등 일본을 발판으로 수년간 대남 공작을 벌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관하고 있다는 강한 불만을 전달하고 일
본이 조총련의 이 같은 행위를 단속하지 않을 경우 한국과 일본과의 외교 절단까지 단행할 것을 위협하기도 했으나 이듬해 일본에서 당시 중앙정보부가 연관된 의혹이 제기된 김대중 납치
사건이 발생하자 극에 달은 양국의 국가적 마찰이 외교적 협상을 통해 수습된 바 있다.<신용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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