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군 창설 주역 임선하 예비역 소장
대한민국 군 창설의 주역 중 한명인 임선하(84) 예비역 소장이 시카고를 방문했다.
함경남도 영흥 출생으로 일본 유학을 갔다가 학도병으로 특별 지원병(강제)으로 징집됐던 임 예비역 소장은 1945년 8월15일 광복 이후 고향 갔다가 공산주의가 판쳐 서울로 이주한 뒤 당시 미 군정의 주도아래 모집 중인 국방 경비대에 창설 주역 중의 한명으로 입대했다. 군번 19번(사실 군번이 아니고 월급 카드 정리 위해 부여받은 번호)을 부여받은 임 예비역 소장은 경비대 들어가자마자 소위로서 인사행정 업무 맡았으며 1949년에는 당시 27세의 나이로 시흥에서 보병학교 학교장을 맡기도 했다. 6.25 전쟁 발발후에는 대령으로 2사단장 발령이 났고 수원에서 미군 20사단 딘 장군 한국군과 연락장교로 활동했으며 두달만에 최연소 장군으로 진급했다.
임 예비역 소장은 6.25에 대해 젊은 사람들을 많이 잃었다. 한 청년이 나가서 싸울 것 같으면 최소 6개월 교육은 받아야 한다. 하지만 6.25 동란 때 한국군이란 것은 한쪽에선 모집하고 한쪽에선 교육 없이 총만 쥐어주고 나가서 싸우게 했다. 충분한 훈련과 무기를 주지 못했던 것이 아쉽고 미안하다. 군인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훈련이 필요한데 그러한 기간도 없었고 무기도 없었다고 당시 절박했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또한 초전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대적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이 안됐다며 지휘관의 임무는 부하를 지키는 게 첫째다. 당시의 나로선 대단히 안타까운 게 충분한 교육과 훈련을 못시켜 아까운 생목숨을 전장에 내보내야했던 게 마음 아프다고 전쟁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에 대해 안타까워 했다.
그는 우리가 군대를 시작했을 땐 낫놓고 기역자로 모르는 군인들이 70%라며 후배 군인들에 대해서 오늘날 대한민국군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 없는 가장 근대화되고 잘 훈련된 군대다. 동맹군과 함께 한미방위협정에 의한 임무 담당에 절대 손색 없다. 우리와 같이 싸워줄 수 있는 연합군도 믿을 만하다. 우리 국군에 대한 신뢰라는 것은 절대 다른 어느 나라 군보다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판문점 정전 회담시 1년간 대표를 지냈던 임 예비역 소장은 후배 군인들과 젊은이들이 역사를 제대로 알기 바란다며 당시 북한군은 완전히 우리의 적이었다. 현재로 우리의 적은 이북이다. 우린 지금 정전 상태이지 휴전 상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1959년말 1군 관구 사령관으로 예편한 임 소장은 1972년 미국으로 이민왔으며 현재 부인(샌드라 임)과 함께 네브라스카주 오마하에 거주하고 있다. <임명환 기자>
사진: 임선하 예비역 소장과 부인 샌드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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