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수필가/환경엔지니어>
VIP가 뇌일혈로 쓰러진다. 나노 과학자들이 만든 박테리아 만한 잠수함을 타고 환자의 혈관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막힌 혈전을 걷어낸다. 그 와중에 극소 잠수함을 병균으로 오인한 백혈구들의 맹렬한 공격을 받는다. 대동맥 속에서는 폭포처럼 쏟아지는 피의 파도를 타며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한다. 1966년 스테판 보이드와 라켈 웰치가 나왔던 인체 속의 공상과학 영화 「환상 여정(Fantastic Voyage)」의 줄거리다.
2천년대가 되면서 축소과학의 공상이 점점 현실로 변하고 있다. 소위 나노(nano) 시대의 도래이다. 나노는 희랍어 나노스, 즉 난쟁이란 말에서 왔다고 한다. 나노미터는 10억 분의 1미터. 원자 몇 개를 모아놓은 DNA 크기이다. 물질이 이 정도로 작아지면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물리 화학적 성질이 나타난다.
나노기술이란 이런 초 미세(微細) 영역에서 나타나는 물리 화학적 성질을 이용해 보다 강하고 실용적인 물질을 창조하는 과학이다. 탄소 원자를 엮어 만든 나노튜브는 1.2나노미터 밖에 되지 않지만 강철보다 100배나 강하다. 이 기본 틀로 기존 물질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 물질을 양산하는 것이다. 나노과학은 생명공학과 함께 21세기 산업혁명을 주도할 새 총아로 뜨고있다.
나노기술이 활발한 분야가 의학이다. 영화에 나왔던 작은 잠수함은 나노로봇이다. 나노로봇이 혈관을 따라 가며 바이러스를 박멸한다. 또 세포 안에 들어가 정비공처럼 암세포를 죽이고 상한 세포를 수리하기도 한다. 나노로봇이 암세포만 골라 약물을 집중 투약한다. 나노 화장품도 인기다. 화장품 구조가 피부 세포 간격보다 작기 때문에 피부에 쉽게 흡수된다. 주름이 없어지고 노화를 막는다. 이 외에도 속도가 빠르고 선명한 전자 제품, 항균 유아용품, 탄소 섬유를 이용한 가볍고 견고한 스포츠 용구 등, 응용분야가 무궁무진하다.
사실 위대한 과학자들은 예언자들이다. 영감을 가진 선견자들이다. 나노기술의 선구자는 리처드 파인만(Feynman) 이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그는 1959년 「물질의 미시(微視) 세계도 우주만큼 넓다」란 가설로 나노세계의 장을 열었다. 대영 백과사전이 바늘 끝에 쓰여지며 원자 수준에서 물질을 조작할 날이 온다고 예견한 것이다. 모두 설마 했었다. 그러나 80년대 초, 원자의 구조를 직접 조작 할 수 있는 스캔형 현미경과 원자 현미경이 등장하면서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두 얼굴이 있다. 순기능과 역기능인 것이다. 생명공학에도 생명복제에 따르는 윤리 문제가 심각하다. 나노과학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문제가 초소형 카메라 등을 사용한 사생활 침해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개인 생활이 감시당하는지 조차도 모른다. 나노기술을 이용한 가공할 군사 무기 경쟁도 큰 역기능이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마이클 크맄톤은 소설「희생제물(Prey)」에서 나노기술의 무서운 악영향을 실감나게 경고하고 있다. 네바다 사막의 한 실험실에서 나노로봇들이 대량 유출돼 인간을 공격한다는 줄거리다. 나노로봇은 두뇌 컴퓨터가 있어 스스로 생각하고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준(準) 생물체들로 묘사돼 있다. 결국 로봇을 만든 인간들의 모든 제어 노력이 실패하면서 로봇은 오히려 인간들을 희생물로 삼는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는 환경오염 가능성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나노입자들이 양산될 때,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사람들의 뇌나 장기에 들어가 폐해를 일으키는 문제이다. 마치 석면조각이나, DDT 농약의 미세한 입자들이 부지불식간에 인체에 스며들어 치명적인 암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나노기술의 두 얼굴 - 선한 지킬박사가 괴물 하이드를 제어할 수 있는 나노과학 윤리(Nanoethic)를 세우는 것이 시급하다. 윤리 없는 과학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 와 같다. 인간을 위한 이기(利器)가 인간을 해치는 흉기가 될 소지가 다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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