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인류가 추구해 온 보편적 정치적 이상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주의다. 서양 역사는 이를 실현하는 방법에 두 가지 모델이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는 온건과 타협을 기조로 하는 영국식이며 다른 하나는 혁명과 비타협을 외치는 프랑스식이다.
그러나 영국이 처음부터 온건했던 것이 아니라 과격과 급진의 폐해를 경험한 후 이를 버렸다고 보는 것이 사실은 더 정확하다. 1215년 귀족들의 반란으로 존 왕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한 후 유럽에서 가장 왕권이 미약했던 나라의 하나인 영국은 17세기 중반 찰스 1세가 다시 귀족들을 무시하고 전제 정치를 펴자 의회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의회군은 처음에는 왕의 군대에 밀렸으나 크롬웰의 지도하에 이를 물리치고 왕을 생포한다. 왕이 다시 도전해오자 크롬웰은 왕을 잡은 후 1649년 1월 도끼로 그의 목을 쳐 왕정을 끝내고 공화국을 수립한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파티와 무도회를 금하는 등 왕정 때부터 혹독한 독재에 지친 영국민은 그가 죽은 후 프랑스로 도망간 찰스 1세의 아들을 모셔다 왕으로 받든다.
극적으로 왕위를 되찾은 찰스 2세는 권좌에 앉은 후 예상과는 달리 자기 아버지를 죽인 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복수를 하지 않았다. 자신이 유랑 세월을 하는 동안 자기를 박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아첨에 급급한 모습을 본 그가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고 보복보다는 인생을 즐기며 사는 쪽으로 마음을 고쳐 잡았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후 왕위를 물려받은 동생 제임스 2세가 다시 전횡을 일삼으려 하자 반란이 일어난다. 그러자 제임스 2세는 반란군과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도주했다. 이것이 대표적인 무혈혁명인 1688년의 명예혁명이다. 그 후 영국은 지난 300여 년 동안 한 번도 혁명을 겪지 않고 안정적인 민주주의를 실천해왔다.
반면 자유와 평등을 내걸고 1789년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는 지난 200여 년 동안 심한 정치 혼란을 겪었다. 1793년 1월 단두대에서 루이 16세의 목을 친 것을 비롯, 수많은 귀족들이 처형됐다. 반혁명 세력뿐만 아니라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 등 혁명 지도자들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암살됐다. 나폴레옹의 쿠데타와 독재로 안정되는가 싶더니 곧 이어 그가 일으킨 침략 전쟁으로 전 유럽은 화염에 휩싸였다.
그의 몰락 후에는 1830년의 7월 혁명, 1848년의 2월 혁명, 나폴레옹 3세의 궁정 쿠데타와 제정, 파리 코뮌과 제3공화국, 제2차 대전 후 제4를 거쳐 지금의 제5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혼란이 그치지 않았다. 지금 와서 보면 어느 쪽이 더 이상적인 정치 발전 방식인지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는 얼핏 프랑스와 비슷하다. 이승만 독재와 4.19, 5.16과 유신, 5.18과 신군부 독재, 6.29 선언 등등.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면 사실은 영국식과 더 닮아 있다. 이승만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자 자발적으로 물러났고 한국민은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무혈 쿠데타로 집권했으며 집권 후 전 정권 인사들을 처형하지 않았다. 5.18로 인명이 희생됐으나 영국과 프랑스 내전에 비교하면 적은 숫자며 6.29는 한국판 명예혁명에 비견할만한 대타협의 산물이다.
이회창 대통령 출마 선언 후 오랜 침묵을 지키던 박근혜가 이명박 후보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소식이다. 이명박 후보가 박 전 대표를 차기 정권의 파트너로 대접하기로 한 후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박 전 대표 말대로 같은 한나라당원으로 당연한 결정이다.
민주주의는 타협의 체제다. 조금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툭하면 당을 박차고 뛰어나가고 당을 쪼갰다 합쳤다 하면서 체제를 뒤엎으려는 것은 정도가 아니다. 경제 발전은 비교적 단시일에 가능하지만 정치 발전은 오랜 시일이 걸린다. 한국은 단기간에 둘을 모두 해낸 보기 드문 나라다. 박근혜의 이번 결정은 한국 정치가 힘들고 느리지만 한 발짝씩 전진해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 본다.
민 경 훈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