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한 때 돌풍을 일으켰던 TV 연속극에 ‘모래시계’라는 것이 있다. 70~80년대 한국 대학가와 정국을 무대로 당시 사회상을 리얼하게 그려낸 이 드라마는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 시간대면 식당이나 술집이 파리를 날리기 일쑤여서 ‘귀가시계’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이 드라마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여러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일반 국민들이 갖고 있는 검찰에 대한 극심한 불신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상원이 양심 있는 검사로 나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수사하는데 아무도 그 진실성을 믿어주지 않는다. 박상원은 한 때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까지 하지만 검사들이 똘똘 뭉쳐 저항하는 바람에 정권은 결국 무릎을 꿇고 정의는 승리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대다수 시청자들은 양심 검사의 승리보다는 검찰의 공정성에 대한 불신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느꼈을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 정부 아래서 검찰들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 고생을 시켰는가. ‘검찰은 권력의 시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사람을 감옥에 넣느냐 마느냐를 일차적으로 결정하는 검찰의 역할에 대한 고민은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권력자가 관련된 범죄가 발생했을 경우 그 권력자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검찰이 과연 공정한 수사를 할 수 있겠느냐는 고민은 미국에서도 똑같이 존재한다. 그래서 대통령에 관한 비리를 수사할 때 특별 검사를 임명하는 것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특별검사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맡은 아치볼드 콕스라는 인물이다. 닉슨이 백악관 회의 장면을 녹음한 비밀 테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그는 이 테입을 증거물로 제출할 것을 요구하나 닉슨은 오히려 그의 파면을 법무장관에게 지시한다. 그러자 엘리엇 리처드슨 법무장관과 윌리엄 러클스하우스 차관은 이에 항의, 사임하며 콕스는 나중에 대법관 지명파동을 일으킨 로버트 보크에 의해 파면된다. 그러나 이는 결국 정치적 역풍을 일으켜 닉슨 사임으로 이어지고 만다.
클린턴 재임시절 르윈스키 사건 때도 케네스 스타가 특별검사로 임명돼 오랫동안 워싱턴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현직 대통령의 추잡한 사생활이 만천하에 폭로되고 백악관 주위 인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특별검사 소환에 응하느라 한 때는 행정부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 결과 수만 페이지에 달하는 케네스 스타 보고서가 만들어졌지만 클린턴 탄핵이 무위로 끝나면서 이 제도는 지나친 예산과 정력의 낭비라는 비판과 함께 1999년 폐지됐다.
한국의 통합 신당이 BBK 사건을 수사한 검사를 탄핵하는 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한다. 한국에서 검사가 정치적인 이유로 탄핵 대상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특별 검사를 임명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정치적 이슈를 법으로 푸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담당 검사를 탄핵하건 안 하건, 특별 검사를 임명하건 안 하건 논란은 계속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닉슨을 사임시키고 클린턴에게 면죄부를 준 것은 직접적으로는 정치의 주무대인 의회고 넓게 보면 여론이다.
대선을 1주일 남긴 한국 정계가 BBK 사건을 둘러싸고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한 때 이명박 후보의 동지였던 이회창 진영이 정동영 캠프와 손잡고 검찰을 공격하는가 하면 한 때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이야말로 노무현 정부의 최대 업적”이라고 주장하던 이해찬 전 총리는 검사 탄핵의 선봉에 서고 있다.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부와 나란히 검사 탄핵에 반대하고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민노당과 함께 이회창 후보를 공격하고 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가 불분명한 상태다. 이념이나 신념, 자기가 전에 한 말에 대한 신의 따위는 찾아볼 수 없고 자기 눈앞의 이익에 따라 날뛰는 모습이 너무도 보기 딱하다. 한국 민주주의가 성숙하기까지에는 아직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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