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9년 지중해를 면한 이집트 항구 로제타에서 두 가지 이집트어와 그리스어로 뭔가가 쓰여진 비석이 발견됐다. 같은 내용을 세 가지 말로 적은 이 비석은 그 때까지 아무도 읽을 줄 몰랐던 이집트 어를 해독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줬고 이와 함께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이집트의 역사가 알려지게 됐다.
이집트 문명을 여는 열쇠가 로제타 스톤이었다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해하는 데는 베히스툰 문자가 긴요한 역할을 했다. 1835년 영국 동인도 회사 장교였던 헨리 롤린슨은 지금 이란 북쪽의 한 암벽에서 고대 페르샤어와 바빌론어, 엘람어로 적힌 기원전 6세기 다리우스의 왕명을 발견, 바빌론의 쐐기 문자를 해독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그러나 고대 아수르바니팔 왕립도서관의 방대한 벽돌 문서를 처음 해독한 학자들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사회상을 그린 문학 작품이나 역사, 철학적 기록을 기대했건만 문서의 대부분은 국가의 세금 출납 장부였다. 이는 바빌론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미케네 문명의 신비를 파헤쳐 줄 것으로 기대했던 고대 그리스 문자 리니어 B 해독 결과도 같았다. 이 문자로 적힌 글의 대부분은 세금 관련 문제였다. 로제타 스톤 자체의 내용도 파라오가 이런저런 세금을 면제해 준다는 것이었다.
역사와 선사를 나누는 기준은 문자다. 그 문자가 생긴 시기는 고대 국가가 성립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리고 그 문자가 주로 이용된 것은 국가의 재정 출납이었다. 이는 국가의 통치자들이 재정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 문자를 발명했으며 문자가 국가라는 방대한 조직의 운영을 가능케 했다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집권자들은 세금을 통해 피지배계층이 생산한 물자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이를 차지하려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군대 양성이 고대 국가의 본질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파라오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정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어느 나라나 군대를 갖고 있다는 점은 달라진 바 없다. 그러나 이제 집권자가 국민을 쥐어짜 호의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있다면 다음 선거에서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임기 도중에라도 탄핵돼 감옥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 모든 민주주의 국가의 핵심 의제는 어떤 계층으로부터 얼마나 세금을 걷어 이를 누구를 위해 쓰느냐다. 한 때는 부유층으로부터 소득의 90%까지 세금으로 빼앗아 ‘무덤에서 요람까지’의 복지국가를 지향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그렇게 해 본 결과 부자는 다 도망가고 국민들은 일을 하지 않아 경제가 파탄난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금을 아예 없애고 복지 예산을 배정하지 않는 나라도 없다. 국가를 운영하는데 최소한의 경비가 들뿐 아니라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나 표를 의식해서나 고령자, 의료, 극빈자의 복지를 어느 정도 배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어떤 선에서 조화시킬 것인가가 늘 민주국가 선거의 핵심 논쟁 사항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21세기 선진 민주국가를 자처하는 한국에서는 이 문제가 제대로 논의되지 않고 있다. 대선을 하루 앞둔 18일까지 1년 내내 온 나라가 BBK 타령으로 날을 지샐 뿐 후보들이나 국민들이나 앞으로 세금을 누구한테 얼마나 거둬 어느 정도의 복지 정책을 펴나가겠다는 데 대해선 별 얘기가 없다.
한국이 제대로 된 민주국가로 성장하려면 낮은 세금을 통해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당과 세금을 더 거둬서라도 복지를 늘리겠다는 당이 양대 정당으로 자리 잡고 두 후보가 어떤 것이 국민이 원하는 정책이고 한국의 발전을 위해 옳은 길인가를 밝힌 후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지금처럼 집권 여당이 ‘헤쳐 모여’를 수없이 반복하고 죽은 척 하고 있던 후보가 선거 막판에 뛰어 들어 혼란을 일으키는 일은 이제 그만 했으면 한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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