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추억의 보석 상자를 열면 만리포가 보인다. 갯벌 드넓은 태안반도 변의 활처럼 굽은 하얀 모래밭. 인천에서 통통배로 몇 시간인가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면 낙조(落照)가 불타는 곳에 포구가 있었다. 변산, 대천과 함께 서해안 3대 해수욕장으로 꼽히던 만리포 백사장. 그 사구 위에 모닥불을 지피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별빛을 맞으며 둥둥 기타를 두들겼다.
초저녁엔 흥에 겨워 박경원의‘만리포 사랑’을 구성지게 불렀다. 「똑딱선 기적소리 젊은 꿈을 싣고서/ 갈매기 노래하는 만리포라 내 사랑...」 그러다가 모닥불이 스러질 때면 우리는 보컬 팀, 키 보이스처럼 멋을 내어 화음을 모았다.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만난 그 사람/ 파도 위에 물거품처럼 왔다가 사라져간 못 잊을 그대여...」
이른 아침, 싱그러운 해변을 걷노라면 먼발치 천리포 수목원 숲이 푸른 성(城)처럼 떠올랐다. 내친김에 파도가 예쁘다는 파도리까지 가선 갯벌 위에 널려진 해옥(海玉)을 발바닥이 아프도록 밟았었다. 어느 핸가는 배를 타고 안면도까지 내려갔다. 뱃길 중에 황무지가 변해 황금어장이 되었다는 황도(黃島). 해안절벽과 후박나무 숲이 멋있게 어울리는 외도, 기암괴석과 동백 숲이 장관을 이루던 내파수도같은 낙도(落島)들을 바라보며 바다의 멋에 흠뻑 젖기도 했다.
옛날, 안면도 갯벌체험은 내가 후에도 생태계에 관심을 놓지 않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간조 땐, 따개비, 맛조개 같은 조개들이 지천이었고, 잽싸게 기어다니는 방게들을 쫓기도 했다. 1980년대만 해도 갯벌은 쓸모 없는 땅으로 여겨 대규모 간척, 매립사업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젠 갯벌이 하천에서 쓸려오는 온갖 오염을 걸러주는 자연 정화지며 생태계의 보고임을 알고 있다. 요즘 갯벌 보전운동이 활발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데 지난 12월 7일, 태안반도 1300리 청정 해안은 기름 폭탄을 맞았다. 순식간에 검은 사해로 변했다. 만리포, 천리포 해수욕장과 갯벌은 기름 파도가 밀려와 독한 원유냄새가 진동하는 시궁창이 되고 말았다. 홍콩 유조선, 허베이 스피리트과 해상 크레인 운반선이 충돌, 원유 1만여 톤이 바다로 대량 유출된 것이다.
기가 막힌 것은 100% 인재(人災)란 사실이다. 1995년 시프린스호 오염사고처럼 폭풍우가 원인이 아니었다. 기본 안전항해 수칙을 어기고 서로 피하겠거니 책임을 미루다가 국내 사상 최대의 원유오염 재난을 만난 것이다.
기름이 바다에 쏟아지면 서서히 형태가 변한다. 우선 기름물의 부피와 점도가 늘어나면서 에멀전 현상이 일어난다. 그리고 수 시간 내 기름띠가 해류를 따라 확산되고 일부는 증발한다. 해안바위까지 밀려온 타르는 범벅이 되어 엉겨붙는다. 유막 형태로 바다에 떠다니는 기름띠는 수주일 내지 수개월 내 풍화작용을 거쳐 공 모양으로 굳어져 가라앉는다. 이 오일볼이 생태계에 특히 해롭다고 한다.
이번 재앙으로 태안반도에 서식하는 약 200여종 해조류와 340종 해양동물 등, 생태계가 크게 붕괴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플랑크톤은 사라지고, 굴 전복 양식장도 모두 폐사했다. 엑손 발데즈 사건 때 그곳 연어를 10년간 먹지 못했던 예를 보아 회복에 오랜 세월이 걸릴 것 같다. 염습지까지 완전복구에 20년까지 내다보고 있다. 여름철새들이 돌아오는 5월까지 기름을 제거 못하면 철새들의 떼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란 예고도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다행히 50만 가까운 자원 봉사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손으로 기름범벅이 된 해변을 닦고있는 모습에 가슴이 찡하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도 가서 기름 묻은 갯바위와 해옥 조약돌을 닦고 싶다. 「초록빛 비단물결 은모래를 만지네」 ‘만리포 사랑’을 다시 흥겹게 부르며 타는 저녁놀을 시름없이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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