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8월 미국 경제는 대공황 이래 최악의 국면을 맞고 있었다. 물가는 매년 두 자리 수로 뛰어오르고 석유파동으로 기름 한번 넣으려면 주유소 앞에 장사진을 쳐야 했으며 실업자는 증가일로를 걸었다. 미국인들의 삶이 고단해지는 것과 반비례해 지미 카터 대통령의 인기는 하루가 다르게 추락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론이 없었다. 그리고 그 최선의 방법이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 새 의장에 폴 볼커를 임명하는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권 단체의 압력에 굴하지 않을 만큼 뚝심이 있고 시장이 신뢰할만한 사람 가운데 볼커만한 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터의 정치 보좌관 중에는 반대 의견도 있었다. 볼커를 임명하면 그는 정치적 파장은 고려하지 않고 인플레를 잡기 위해 금리를 대폭 올릴 텐데 그렇게 되면 불황이 오고 카터의 재선에 먹구름이 낀다는 분석이었다. 카터는 고민 끝에 볼커를 택했다. 더 이상 인플레를 방치할 경우 미국 경제가 결딴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볼커는 예상대로 연방 기금 금리를 20%대까지 올렸고 미국 경제는 대공황 이래 최악의 불경기를 경험했다. 카터는 재선에 실패했지만 인플레는 3%대로 떨어졌고 미국 경제는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볼커 에피소드는 FRB가 갖고 있는 막강한 힘을 입증한 실례로 자주 인용된다. 경제에 관한 한 FRB와 이를 주도하는 FRB 의장만큼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은 없다. 미국인들이 매일 사용하는 1달러 지폐를 가만히 살펴보면 ‘돈’이란 단어 대신 ‘연방 준비은행 발행 채권’(Federal Reserve Note)이라고 적혀 있다. 이 연방 은행 채권이 미국에서 유일하게 인정받고 있는 법정 화폐다. 이를 얼마나 발행하느냐, 그 가치를 어느 정도 유지하느냐는 전적으로 FRB의 고유 권한이다.
FRB는 필요하면 얼마든지 돈을 찍어낼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을뿐더러 미국내 기업 대출과 크레딧 카드 등 이자율의 기준이 되는 연방 기금 금리를 정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기업이 발행한 빚의 보증을 서기도 한다.
지난주는 FRB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다시 한번 과시한 주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어 스턴스의 파산이 임박해지자 FRB는 일요일인 16일 베어 스턴스와 JP 모건 체이스 관계자들과 긴급 회동을 갖고 아시아시장 개장 전 모건의 베어 스턴스 인수를 발표했다. 재할인율도 내리고 30년대 대공황 이래 처음 300억 달러에 달하는 베어 스턴스의 빚 보증도 섰다. 필요할 경우 FRB가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얼마나 다양한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FRB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놓고 처음에는 비판적인 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1주일이 지난 지금 일단은 극약처방이 성공을 거뒀다는 평가가 주류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증시가 안정을 되찾고 있고 달러의 추락세도 멈췄다. 금과 기름, 상품가격도 하락세로 돌아섰고 무엇보다 FRB가 금융위기를 방치하지 않을 것이란 투자가들의 믿음이 되돌아오고 있다.
만약 지난 주 FBR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베어 스턴스 파산과 함께 2차, 3차 금융 도미노가 발생하고 가뜩이나 얼어붙은 금융시장은 마비됐을지 모른다. 이는 돈줄이 막힌 기업의 연쇄도산을 부르고 대공황 이후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아무도 할 수 없었으리라.
FRB의 신속한 대처로 최악의 국면은 피했지만 이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문제의 시발점인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정리되려면 아직도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대선의 해인 올해는 연초부터 오바마와 힐러리, 매케인이 뉴스의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먹고사는 문제에 관한 한 미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주목해야할 사람은 벤 버냉키 FRB 의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 한 주였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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