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한인회(문병길 회장) 이사회의 국민의례에서 정창화(맨 오른쪽) 수석부회장과 박충길(오른쪽 두번째) 이사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모습.
제1회 한인회장배 축구대회를 주관한 축구협회의 손이생(왼쪽 세번째) 회장과 박충길(오른쪽 세번째) 부회장(위).
한식당 코리아 하우스 타운 업소 형성 기반
전 우정회 박충길 회장 ‘마당발’ 32년 한인사회 대소사 관여
76년 한인인구 400~500여명… 중국마켓서 한식 갈증해소도
박충길씨는
박충길 전 우정회 회장은 한인 커뮤니티에서 ‘마당발’로 통한다. 1976년 미국으로 건너와 첫 정착지가 샌디에고였다. 이후 줄곧 한인회를 포함, 커뮤니티의 각종 대소사에 관여, 끈끈한 인간관계를 유지해 오면서 선배에게는 의리 있는 아우, 후배에게는 따뜻한 형 노릇을 해왔다. 그가 살아온 샌디에고 32년간의 한인 이민사를 들어본다.
76년 당시 한인타운
박충길씨가 76년 샌디에고에 발을 디딜 당시, 한인타운은 없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썰렁한 허허벌판’이었다. 한인 인구는 400~500명 정도로 추산했다. 중국 사람을 보고도 한인처럼 여겨져 반가울 정도였다. 한인뿐 아니라 아시안이 보기 드물던 시대였다고 한다. 한인들의 유일한 만남의 장소인 교회도 3~4개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마켓에서 한국음식 갈증해소
70년대 중반 한인타운 인근에 한인마켓은커녕 중국마켓조차도 없었다. 퍼시픽 비치에 ‘VIP’라는 한국 식당이 하나 있을 정도였다 한국음식에 갈증을 느끼던 한인들은 SD 다운타운의 중국마켓 ‘우지청’을 이용, 그래도 우리 입맛에 맞는 된장 등을 구입해 그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한인끼리 만나면 반가워 서로 전화번호와 주소를 교환, 동족애를 나누곤 했다.
현재의 시온마켓은 문병길 전 한인회장의 친척들이 현재 칸보이 스파 자리에서 시작, 날로 발전을 거듭해 오늘 날 오렌지카운티 등으로 퍼져가는 대형 마켓으로 성장했다.
한인회관 역사
첫 한인회(회장 송두영)가 76년에 들어선 이후 78년 한인회관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사무실이 다운타운에 문을 열게 된다. 당시 사무장은 해병 전우회 원로인 박원규씨. 그 후 이렇다 할 사무실이 없다가 김기홍·민병진 회장 시절에 대장금 식당 뒤편에 사무실을 갖게 된다. 그리고 현재의 한인회관으로 틀을 갖춘 것은 김일진 회장 때로 기억하고 있다.
한인타운 업소 형성
칸보이의 한인타운 형성 시기는 80년 중반쯤으로 보고 있다. 초대 한인회장을 지낸 송두영씨의 코리아 하우스가 유일한 한인 식당으로 들어서면서 신라관, 아리랑 하우스 등 한인 식당이 뒤이어 오픈, 타운 내 업소들이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됐다.
〈문종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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