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4월은 대학이나 대학원의 합격 여부를 통지받는, 소위 심판의 달이다. 실패 혹은 성공이 가려지면 그에 따라 희비가 교차된다. 교육자로서 나는 성공에 들뜬 학생들을 보는 동시에 인생 최초로 큰 실패를 맛보게 된 젊은 학생들을 마주해야 한다. 그때마다 나는 ‘죄와 벌’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조심스럽게 꺼내곤 한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실패했다고 해서 낙심하지 않는 일이며, 성공했다고 해서 기뻐 날뛰지 않는 일이다.”
인생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뜻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곧잘 한다. 그러나 막상 실패한 이들 앞에서 이 말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시험에 떨어지고, 사업에 실패하고, 때론 사랑에 실패하고…. 경험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 힘든 속내를 이해하기 힘들다. 내 앞에 어떤 인생이 어떻게 펼쳐지게 될 지, 모든 것이 아득하고 멀기만 하다.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섰을 때 더 나은 내일이 펼쳐지게 된다는 분명한 진리를 깨닫는 건 세월이 한참 흐른 뒤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나의 제자 중 이 사실을 너무 일찍 깨달은 인생의 고수가 있었다. 심도 있는 피아노 공부를 시작한지 고작 2년만인 올해 1월, 줄리아드,
USC, 맨하탄과 같은 우수 음대의 1차 오디션 합격 편지를 받아 나 역시 큰 기대를 걸었던 학생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해피엔딩일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 아닌가.
기쁨 속에 준비한 2차 시험의 결과는 “다음에 다시 도전하세요”라는 잔인한 4월의 편지로 끝이 났다. 좌절하고 있을 제자를 어떻게 위로해 주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고 있던 나를 놀라게 한 건 그의 태도였다.
“최선을 다해 가르쳐 주셨는데, 실망시켜 드려 죄송해요 교수님. 그렇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저는 교수님과 일년을 더 공부해서,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도전할 수 있어 좋습니다. 저의 멘토로서, 피아노 선생님으로서 앞으로 한해 동안 잘 부탁 드립니다”
실패한 제자가 오히려 선생인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확신했다. 올해 오디션에서 실패했지만 그의 인생은 성공으로 달려가고 있다고 말이다. 어쩌면 실패가 아니라 더 큰 성공으로 가는 ‘작은 성공’이라 생각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나를 더욱 감동 시킨 것은 물러서지 않는 그의 ‘용기’였다. 현실적으로 피아노를 늦게 시작한데다 올해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내년에는 경쟁이 덜한 대학들에도 지원해 보자고 권유했다. 그는 웃으며 겸손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목표한 대학에 진학 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도전 할래요.”
실기시험을 치러야 하는 음대의 진학은 원서만 우편으로 보내는 다른 과의 진학과는 차원이 다르다. 보스턴, 뉴욕, 시카고, 로체스터 등지를 여행하며 각 학교에서 실기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이때 드는 항공료와 숙박 경비만도 2,000~3,000달러는 족히 든다. 게다가 낯선 곳에서 시험을 쳐야 하기 때문에 실기시험을 앞두고 연습할 곳을 찾아 헤매야 한다. 급한 대로 그 지역의 학원이나 교회를 찾아가 구걸하듯 피아노를 빌려 연습하는 어려움까지 이중삼중의 힘든 상황들을 겪어내야 한다. 그 과정을 고스란히 겪었던 나로서는 불과 한달 전 힘든 상황을 경험했던 그가 1년 뒤, 다시 그 과정들을 되풀이하겠다는 용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러서지 않는 그의 도전과 용기에 마음속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건 아니다. 다시 일어서 열심히 달릴 수 있는 용기, 그것을 가진 이들에게만 실패는 성공이 되어 다가올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생각해보면, 내 인생은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일어났던 것이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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