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운정 선생께서「현대수필」봄 편을 보내주셨다. 글을 읽다가 ‘줄탁동시’란 예사롭지 않은 사자성어에 마음이 끌린다.
병아리가 부화할 때가 되면 알 안에서 껍질을 깨려고 어린 부리로 온힘을 다해 쪼아댄다. 세 시간 안에 나오지 못하면 질식하니 사력을 다한다. 그것이 병아리가 안에서 쪼아댄다는 뜻의 줄(茁)이다. 이때 어미 닭이 신호를 알아차려 바깥에서 부리로 알 껍질을 쪼아줌으로서 병아리의 부화를 돕는다. 이렇게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주는 것을 탁(啄)이라 한다. 줄과 탁이 동시에 일어나야 한 생명이 완성된다는 것이 ‘줄탁동시’이다.
줄탁동시의 뜻을 새겨보니 내심 자식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한번도 부모로써 제대로 ‘탁’해준 적이 없다. 큰 아들아이가 얼마 전, 스탠포드 대학병원 전공의 두 자리를 놓고 면접을 보던 날, 전국에서 모인 경쟁상대들의 많은 수가 대대로 의사집안이거나 대학 기부자들 자제인 사실을 알고 심난해 하던 생각이 난다. 이 땅에 뿌리 없는 이민자의 자식임에도 다행히 뽑힌 건 순전히 미국의 공정한 심사제도와 본인의 줄기찬 쪼아댐(茁), 그리고 기도덕분으로 알고 감사할 뿐이다.
줄탁동시가 어려운 건 부모 능력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완급(緩急)을 조절키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게다. 자식 사랑이 너무 지나치면 어느 한국 재벌처럼 자식을 의존형 인간으로 버리게 되고, 너무 부족하면 평생 사랑결핍증에 시달리게 하는 걸 우린 주위에서 흔히 보아온 터다. 우리세대의 어려웠던 탓도 있겠지만 나로선 자식이 혼자 힘으로 일어서도록 내버려두는 게 온당한 자식사랑이라 믿고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두 아들을 키우면서 고치를 홀로 뚫고 나오는 나비얘기를 골잘 들려주었다. 얘들아, 애벌레의 고생이 애처로워 실험자가 고치집 끝을 조금 뜯어 주었단다. 그랬더니 나비의 날개에 힘이 붙질 않아 날지 못하더란다. 고치를 억지로 비집고 나오는 순간, 날개 쪽으로 피가 몰리며 힘이 붙는단다. 젊어서 고생은 생존 능력을 키우는 훈련이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말고 홀로 서라.
그런데 지난 주, 랜디 포쉬라는 분의 마지막 강의이란 책을 읽게 되었다. 그는 사십대 중반의 카네기 멜론대학의 유능한 컴퓨터공학 교수다. 가족사진을 보니 밝게 웃는 아내와 대여섯 살, 서너 살, 한 살쯤 되는 세 자녀들이 있었다.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이다.
허나 애처롭게도 포쉬 교수는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은 참이었다. 그는 죽음을 기다리며 마지막 강의를 준비한 것이다. 그 강의는 어린 자녀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입맞춤이 담긴 유언이었다. 비록 지금은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자라 아비의 조언이 필요할 그 때 들려달라고 아내에게 부탁했다.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아내와 아이들이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이 아비가 손을 잡아주지 못하는 게 가슴아픕니다. 그는 고별강의를 이렇게 끝맺었다. 사랑하는 아이들아. 이 아비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말을 to be honest(정직하라) 라고 믿는단다. 거기에 세 단어를 추가한다면 all the time(언제나) 라고 쓰고 싶단다.
나는 그 순간, 줄탁동시(茁啄同時)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언지 깨달았다. 자식들의 홀로 섬(茁)에 대한 집착이나 부모 도움(啄)에 대한 안달보다 그 둘이 함께 일어나도록 때를 맞춰(同時) 주는 부모의 지혜가 더 중요함을 안 것이다. 그 때란 자식들이 부모의 조언을 갈급해하는 그들 인생의 갈림길에 선 순간이리라. 그때를 민감하게 살피며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자식들의 정신적 지표를 준비해 주는 게 부모의 진정한 탁(啄)임을 알게 된 것이다.
다만 자식들이 이만큼 성장토록 지표 삼을만한 삶을 보여주지 못한 어리석은 아비인 내가 새삼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늘 기도 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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