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중략)..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내가 사랑하는 사람, 정호승)
상수리나무 그늘에 앉아 시를 읊는다. 시인의 마음이 푸덕이는 새의 날개처럼 손끝에 잡힐 듯하다. 어쩌면 시상(詩想)이 이리도 아름다울까. 나무숲 속 너른 그늘 자락은 사랑하는 이의 품처럼 안온하다. 그래서 정도 깊다. 음지의 외로움을 아는 사람만이 남의 눈물을 알지 않는가. 그늘이 있기에 영혼의 쉼이 있고, 음지의 고통을 알기에 바깥세상의 밝음에 쉽게 현혹되지 않으리라.
식물도감을 열어 상수리나무를 찾아본다. 상수리는 참나무과 육 형제 중 하나다. 갈참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등과 한 형제다. 조금씩 잎 모양이 틀리나, 모두 도토리열매를 맺는다. 상수리의 어원도 도토리묵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도토리묵에 맛을 들인 순조의 수랏상에 항상 올라’상수라’라고 부른데서 왔다는 것이다. 상수리나무는 한반도 주변 동아시아가 원산지로 낙엽수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옛 팔레스타인 땅에도 상수리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아브람이 세겜 땅에 이르러 단을 쌓고 여호와를 만난 곳도 상수리 숲이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율법을 새긴 큰돌을 세운 곳도 상수리나무아래였다니 상서(祥瑞)로운 나무였던 듯 싶다.
북미대륙에선 참나무가 오크(oak)다. 상수리의 사촌 격인 오크 나무는 블루, 캐년라이브, 코스트라이브, 블랙, 밸리 오크 등 오 형제다. 이곳 오크는 모두 상록수들로서 고도에 따라 서식하는 종류가 다르다. 여름엔 무덥고 가물어도 안개가 촉촉한 캘리포니아주의 오크는 산비탈에 독야청청 하거나 군집을 이루고 산다. 오크는 풍성한 도토리 열매뿐 아니라, 술맛을 숙성시키는’모락톤’이란 성분이 많아 이곳 나파 밸리에서 포도주 저장통으로 쓰인 지 오래다.
옛부터 북가주에선 레드우드와 오크가 으뜸가는 토종수목이었다. 오클랜드란 큰 도시이름만 봐도 알 수 있다. 레드우드 삼나무는 탄닌이 많아 썩지 않고 결이 좋아 건물과 배의 재목으로 수백 년 간 베어낸 탓에 이젠 겨우 5% 남짓 남아있다고 한다. 그 빈자리에 속성수로 호주에서 들여와 심은 게 유클라팁스 나무다. 그러나 결이 비뚤고, 나무기름이 많아 화재위험이 크자 지금은 베어내고 다시 레드우드와 오크로 대체하고 있다.
이런 즈음 오크에 큰 재난이 닥쳐온 것이다. 소위 오크 급사병(sudden oak death)이란 무서운 역병을 만난 것이다. 이는 곰팡이 같은 병원체(P. ramorum)가 주범이다. 1994년 처음 발견된 이래, 캘리포니아에서만 백만 그루 이상의 오크를 고사시켰다. 급속히 퍼지는 이 급사병은 해안 명승지 빅써(Big Sur)의 유명한 참나무 숲을 거의 초토화시켰다.
그런데 지난 달, 이 오크 급사병을 수년간 조사해온 버클리 대학의 가멜로토 교수가 그 진원지로 북가주 머린 카운티의 태멀파이어스 산임을 판명해냈다. 그곳에 누군가 아시아에서 들여온 관상목을 심었는데, 그 나무가 병원체의 숙주(宿主)였음을 밝혀 낸 것이다. 치료는 쉽지 않다고 한다. 벌써 병원체는 돌연변이가 생겨 내구성이 붙은 데다 바람 타고 계속 퍼지고 있다.
나무의 고사(枯死)를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아플 것이다. 미국 땅 오크나무 아래서도 고향 언덕 상수리나무를 생각하며 지천인 도토리를 주으며 행복해하시던 할머니들 얼굴의 그늘을 보기 때문이리라. 맛깔스런 도토리묵을 쑤어 이민생활을 힘겹게 사는 자식들을 보살피는 우리네 할머니. 한 가족의 큰 그늘이신 그네들의 향수를 누가 달래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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