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은 신비하고 아름답다. 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꿈이 살아 있는 때이다. 결혼 초기 눈이 먼 나머지 국제결혼에는 자란 배경이 다른 데서 오는 힘든 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뿐더러 다른 풍습과 습관, 가치관, 식생활 등 살아가는 동안 차이점들이 하나
하나씩 발견된 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성심여고를 다닐 때 여러 나라의 수녀들을 대해 왔고 또 서강대학에서도 많은 외국인을 대해 왔지만 그것으로 서양 사람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그건 그저 겉핥기에 불과할 뿐, 서양 사람과 결혼해 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추운 겨울밤에 야, 거 찬밥 남은 것 없냐? 뜨거운 물 말아서 김치 한 쪽 찢어서 먹자 할 수 없지 않은가. 그 뜨거운 물 말은 밥에서 오르는 김, 훌훌 마실때 온 몸에 느껴지는 훈훈함과 새
콤한 김치 쪽을 깨물면서 느끼는 맵고 짭짤한 맛. 음........
그리고 말 안해도 서로 느끼는 정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그런 느낌이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서양 사람들은 그 정이란 것을 모르니까. 그러니 그 ‘정’을 표현하는 말도 없다.
음식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제일 먼저 당면한 일은 매일 먹어야 하는 음식. 물론 생각도 못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독일 사람들은 저녁에 빵에 버터를 바르고 그 위에 콜드 컷(cold cut)이라 불리는 여러 가지 훈제된 햄과 소시지 등을 먹는데 나는 저녁에 따듯한 음식을 먹어야 먹은 것 같으니까. 하루 정도야 먹을 수 있지만 그렇게 차가운 것을 먹으면 목이 깔깔해서 넘어가지 않았고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매운 음식을 한동안 먹지 않으면 속이 울렁거리는 순 한국 사람이니 말이다.남편은 아니 외국에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서도 그렇게 습관이 안 바뀌었어?라고 큰소리로 떵떵거리면서 습관을 못 버리는 것이 누구인지 우리 집에는 항상 콜드 컷이 있어야 했다. 자기는 그렇게 먹지 않으면 저녁을 먹은 것 같지 않다면서.
심지어 외국인 구경을 거의 못하는 한적한 미국의 시골을 여행할 때 여관(bed and breakfast)의 아침식사 테이블에 훈제된 햄 몇 쪽을 왜 내놓지 못 하느냐고(마치 그 사람들이 있으면서도 안 내어 놓은 것 같이) 생떼를 부려 그런 것 없다고 주인이 언성을 높이며 대답한 적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독일의 호텔이나 여관에서는 아침에 그런 콜드 컷을 내 놓는다. 여러 나라를 다녀 보면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아침 식사가 제일 좋은 것 같다. 약간의 과일, 맛이 있는 여러 가지 빵 그리고 질이 좋은 콜드 컷과 약간의 치즈까지 내어 놓는다. 일반 가정에서는 주말에 그렇게 하고 물론 일하는 주중에는 그저 빵 한쪽에 커피 한잔으로 떼우는 일이 허다하다.
그뿐 아니라 그 당시 미국 슈퍼마켓에는 흰 색에 누르면 스폰지처럼 쑥 들어가는 원더 브레드wonder bread)라는 빵 뿐이었다. 시커멓고 군둥내가 나는 듯한 독일 빵과 색이라도 비슷해 보이는 것을 사러 뉴욕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 남편이 우연히 퀸즈 그린포인트라는 폴란드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서 ‘나쏘 정육점’이라는 곳을 발견 했다. 그 곳에서는 독일 사람들이 먹는 질이 좋은 콜드 컷과 시커먼 빵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 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 집에서는 고급 미국 상점에서도 보기 드문 돼지고기 안심으로 훈제한 락슁큰(lacksshinken), 훈제시켜서 익힌 카슬러(Kassler), 소의 혀로 만든 쭝은 브르스트 (Zungen Wurst) 등도 살 수 있었다. 그 집에서 또 하나 잘 만든 것은 다진 돼지고기를 양념하고 쌀을 조금 섞어서 덩어리를 만든 후에 양배추에 싸서 익힌 것이었다. 토마토를 조금 넣은 국물을 약간 담아 주기 때문에 집에 와서 데울 때에는 생 토마토를 하나하나 잘라 넣고 데워서 국물을 조금 더 넉넉하게 만든다.
하루는 커네티컷 주에서 매주 한 시간 이상을 운전해 음식을 사러 오는 사람을 만났으니 맛있는 것을 찾아다니는 사람인 우리만이 아는 것을 독자들은 알까. 그는 새로 금방 자른 콜드 컷을 먹는 날을 어찌나 좋아 했는지 내가 맛있는 한국 음식을 먹으면서 만족해하는 것과 마찬 가지였다. 그 근처에는 또 한군데 갈만한 집이 있는데 마샬스(Marshall’s)라는 훈제된 생선을 취급하는 유태인 상점이다. 보통 흔한 훈제된 연어 뿐 아니라 쎄이블(Sable)이라는 기막히게 델리케이트한 훈제된 생선을 살 수 있다. 샐러드 위에 몇 점 얹어 서브하면 그야말로 훌륭한 점심 혹은 손님 초대할 때에 고급 첫 코스가 된다.
콜드 컷이 있어야 하는 것 외에 남편은 다른 음식 탓을 하지 않아 그런 것은 아주 편했다. 그저 식탁 위에 오른 것이면 무조건 먹는 것이 자신이 어릴 때부터 배운 것이라고 했다. 단 한 가지 전쟁 후 유치원에서 매일 먹어 죽을 지경이었던 호박만은 절대로 만들지 말라는 청이 있었다. 아니 가을이면 쏟아져 나오는 짙은 주황빛이 나는 그 탐스러운 호박을 사지 말라니! 짙은 녹색이 나는 에이콘 호박(acorn squash·훨씬 크기는 하지만 모양이 도토리 모양 비슷해서 생긴 이름)은 사서 반을 자르고 속의 씨를 뺀 후에 엎어서 오븐에다가 한 40분 정도 익혀 보라. 그리고 거기다가 버터와 흑설탕을 뿌리면 얼마나 꿀맛인지. 군고구마처럼 달콤하지만 훨씬 덜 빡빡하고 촉촉한 것이 장점이다.
한 번은 손님이 왔을 때 닭 국물과 에이콘 호박으로 스프를 만들었다.
음, 맛이 있는데. 무슨 스프야? 하고 물었다. 준비를 않고 있었기 때문에 어 음, 컬리플라워 스프야. 이크, 컬리플라워는 색이 흰데! 얼떨결에 나온 답이었다. 사프론(치자 색을 내는 향신료)으로 색을 냈어.
다행히 더 묻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은 그냥 넘어 갔지만, 그 후에도 여러 번 그런 식으로 호박을 소개했다. <계속>
▲남편이 근사하게 보였던 눈이 삐었던(?) 시절
▲짙은 녹색이 나는 에이콘 호박의 반을 자르고 속의 씨를 뺀 후 엎어서 오븐에 40분정도 익혀보라. 거기다가 버터와 흑설탕을 뿌리면 얼마나 꿀맛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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