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단편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면 엄석대라는 인물이 나온다. 엄석대는 사실 초등학교 5-6학년의 어린아이일 뿐이지만 소설 속의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인물’이란 표현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소설은 주인공 한병태가 서울서 살다가 시골로 전학을 가면서 겪는 이야기이다. 5학년 학생 한병태는 자신이 서울서 전학을 간 데다 공부도 잘했던 터라 시골 학교에 가면 상당히 대접을 받을 것으로 기대를 한다. 하지만 막상 학교에 가보니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반장인 엄석대가 급우들을 완벽하게 손아귀에 움켜잡고 있어서 그는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다. 엄석대는 그 반에서 폭군이자 독재자. 아이들이 시간 맞춰 물시중을 들고, 맛있는 반찬 갖다 바치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시험까지 대신 쳐줄 정도이다.
엄석대는 수시로 아이들을 못 살게 굴고,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빼앗고,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아이가 있으면 협박과 폭력으로 괴롭히며 철저하게 왕따 시킨다. 처음 엄석대의 횡포에 ‘부당하다’고 저항했던 한병태도 질시와 배척을 견디다 못해 결국은 ‘엄석대 왕국’의 2인자가 되고 만다.
소설이 영화로도 만들어질 만큼 공감의 폭이 넓었던 것은 성장기 기억 속에 ‘엄석대’ 같은 인물 하나쯤 없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좀 다르지만 남성들은 필시 3부류중 하나일 것이다. 아이들을 못살게 군 장본인이거나,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거나, 아니면 부당한 걸 보면서도 입 꾹 다물고 있던 방관자이거나.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 어느 중고교 교실에도 엄석대 같은 인물은 한둘씩 있기 마련이다. 특별히 악의적인 경우도 있고 그냥 그 나이의 짓궂은 장난일수도 있지만 당하는 아이들은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니다.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기도 한다.
세상이 하이텍 시대로 변하면서 ‘엄석대’의 무대도 바뀌었다. 아이들을 골려주는 공간이 학교 교실이나 운동장이 아니라 사이버 세계로 이동했다. 얼굴 마주 대하고 모욕을 주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서 충격이 덜 할 것으로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이메일이나 채팅, 마이스페이스 같은 웹사이트, 혹은 유튜브를 이용해 모욕이나 협박하는 소위 사이버 불링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온라인 안전을 계몽하는 I-세이프 아메리카라는 단체가 몇 년 전 4학년-8학년 학생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이버 불링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학생은 42%, 온라인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골탕 먹인 경험이 있다는 학생은 53%였다.
사이버 세계가 현실 세계와 다른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 익명성이나 날조된 신분을 가면 삼아 내면 깊숙이 잠재한 공격성과 폭력성을 여과 없이 드러낼 소지가 있다. 켄터키에서는 한 10대 소녀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협박 메시지를 계속 받다가 자살하는 케이스까지 발생했다.
바른 시민은 현실 세계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사이버 세계에서도 필요하다. 학교와 학부모가 손잡고 아이들을 올바른 네티즌으로 키워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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