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 생신 때 시부모님과 식구들이 모두 잔을 들고 축하하고 있다.
제가 결혼하였을 때 시어머니께서 제가 어떤 집안에서 자랐느냐고 호기심에 찬 질문을 하셨습니다. 우리 쪽에 아무도 만나 본 사람이 없으시니 당연한 질문이었습니다. 우리 집안사람들이 대개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드렸습니다.
집안은 좋지만 물려받을 유산은 없어요. 그리고 이조시대 78년간 세력을 누린 안동 김씨의 역사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남편은 안동 김씨 얘기를 왠만한 한국 사람보다 더 잘 알게 되었고 사람들이 제 이름을 물으면 본까지 신나게 얘기했습니다. 시어머니께서는 아주 집안이 좋은 데서 태어나셨습니다. 대저택에서 하인들과 유모까지 둔 집에서 자랐으며 여러 마리 말을 다루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시어머니 사진 앨범을 통해, 대저택의 모임, 마차 모양과 비슷한 옛날 자동차, 승마를 즐기는 장면 등 영화에서 보는 유럽 상류 사회의 생활을 엿보았습니다.
첫 결혼은 아주 평범한 집안 남자의 해군 장교복 입은 모습에 반하여 결혼하셨습니다. 물론 집안에서 반대하는 결혼. 하지만 전쟁으로 일찍 미망인이 되셨습니다. 전쟁 후에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며 아이들을 혼자 길렀고 모두들 성인이 된 후에 두 번째 결혼을 하셨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아는 두 번째 남편인 우리 시아버지는 법학 교수셨고 상당한 인텔리(시어머님도) 였습니다. 그 분은 만나는 사람마다 누구나 다 좋아하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사이셨습니다. 우리가 롱아일랜드로 이사를 한 후에 두 분이 우리 집을 보러 오셨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시부모에게 하듯이(흉내라도) 정성들여 돌봐 드리고 음식 준비를 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시
아버지께서 저에게 오셔 정중하게 제 손을 잡으며 입술을 거의 대는 것처럼 하시며 구부려 인사를 하셨습니다. 기사도의 영화 장면 같이 말이에요.
이렇게 매일 일만 해서 되겠니? 오늘은 내가 초대할테니 우리 나가서 먹도록 하자고 말씀하신 것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닷새쯤 되서는 두 분이 커네티컷 해변을 따라 경치 좋은 곳으로 떠나 버리셨습니다. 며느리에
게 너무 짐이 될까봐 오시기 전부터 다 계획을 짜신 것이었습니다.
2주 정도 계시더라도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한 저는 그렇게까지 자상하게 생각해 주는 것을 너무나 놀랍고도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두 분은 그저 한 두 달이 멀다 하고 여행을 다니셨습니다. 그것도 유럽에서만 다닌 게 아니라 세계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한 달씩 차를 몰고 캐나다 동쪽에서 서쪽을 골고루 차로 여행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 시어머니는 완전한 여장부. 제가 아무리 용맹스럽고 싶어도 시어머니에 비하면 그저 겁 많은 어린아이
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종자가 벌써 다른 사람인 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 했습니다.
하루는 시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얘, 우리 지금 여행 중이다.
이번에는 어디 계셔요?
지금 칠레 남단에 와있다. 펭귄을 보고 싶어 남극에 간다.
아이, 또 저지르셨군요 하며 저는 큰 소리로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도 웃으시며, “얘야, 73세인 여자가 90을 바라보는 남편을 끌고 남극을 간다고 하면 사람들이 욕을 할 것 같아서 아무에게 말도 못하고 떠났단다 하셨습니다. 그게 얼마나 부담이 되었는지 말도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왜 새삼스레 남의 말에 신경을 쓰셔요?
깔깔댄 저의 뜻밖의 반응에 그 걱정이 고스란히 사라졌고 이제 기분이 홀가분하다고 안도의 숨을 내 쉬었습니다.
드디어 함부르크의 친척들에게도 그 소식을 알리고 우리들은 함께 폭소를 터트렸습니다. 시아버지는 연세가 90이 다 되셨을 뿐만 아니라 무릎이 시큰거려 많이 걷는 것이 불편 하셨으니까요. 그런 사람을 끌고 빙산인 남극에 갈 생각을 한 그 대담한 정신. 저는 그 용기를 너무나 부러워하였습니다. 어떤 불편함이 있어도 모두 깡그리 무시하고 아무 문제없는 사람과 조금도 다름없이 행동하는 그 정신. 참 대단하시죠!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갖고 늘어지는 게으름이 생길 때는 시어머니 생각을 합니다.
주로 과학자들로 구성된 그 여행단은 여행 도중 남극의 환경, 기후, 얼음의 변형 상태 등을 설명하는 토론이나 강의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헬리콥터로 사람을 어느 빙하에 떨어뜨려 놓으면 스키복으로 중무장을 하고 탐험가의 기분으로 살펴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참 신기한 것은요. 남극 여행 중 빙산을 거닐 땐 그 시큰 거리는 다리가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아니면 너무 추워서 마비되었던 것일까요?
빙하로 덮힌 땅, 혜아릴 수 없이 많은 펭귄 등 여태까지 경험하신 모든 여행과 너무나 달랐다고 하셨습니다. 시아버지는 그 여행을 상세히 기록하는 여행기를 쓰셨구요. 돌아 온 후에는 친척들에게 슬라이드 쇼를 하셨습니다. 그 당시 시어머니께서 찍어 오신 멋진 사진은 마침 한국의 삼성 카메라를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며느리가 한국 사람이라 자기가 한국산 카메라로 찍은 것이라고 자랑스러워 하시는 게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커다랗게 확대한 사진 여러 장을 삼성 카메라 미국 지사에 보내 주었습
니다. 우리 시아버지께서 90회 생신 때에 옛날 귀족의 대저택을 빌려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어디서 파티가 열리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시어머니께서 특별한 효과를 내기 위하여 꾸미신 일 이었습니다. 손님들이 탄 버스가 시골의 어느 큰 저택의 마당에 도착했습니다. 우리가 걸어들어 가는데 남자 6-7명이 독일 특유의 레더호전(lederhosen· 세무로 된 반바지)에 산돼지 털이 달린 모자를 쓰고 나팔을 불며 우리를 환영하였습니다. 귀빈들을 대환영하는 축제의 분위기로 그야말로 효과 만점이었습니다. 모두들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즐거워했습니다.
그 저택은 옛날 성처럼 너무 화려 하지도 않고 보통 집보다 약간만 더 품위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옛 그림이 몇 점만 걸려 있어서 그런 저택에서는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한 집이었습니다. 우리를 모두 거실에 모아 놓고 시아버지께서 그 저택의 역사를 설명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나이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습니다. 얘기 하다가 초점을 잊어 버려 아리숭한 나이일 텐데요. 양쪽의 자손들이 모두 모였고 친구들까지 모두 한 50여명이 모였습니다. 우선 마실 것이 서브되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식사가 시작 된 후 중간 중간에 친구나 가족들이 일어나 축하의 건배를 하거나 지난 재미난 에피소드를 얘기하였습니다. 좀 나이가 든 손자 손녀들은 시를 낭독하기도 하였습니다.
메인 코스가 끝난 후에 손자 손녀들을 모두 앞으로 나오도록 부르셨습니다. 우리 딸은 아마 초등학교 1학년 쯤 되었을 거에요. 집안의 내력을 설명하신 후에 시아버지 쪽 가문의 문패가 새겨진 반지를 하나씩 주셨습니다. 유럽에서는 집안이 좋은 귀족의 후손들은 가문의 문패가 새겨진 반지를 자손들에게 대대로 물려줍니다. 요사이는 그런 것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모임에서 그런 반지 낀 사람을 보면 자기네들끼리 서로 인정해 주더군요.
옛날에는 편지 봉투 닫는 부분에 초를 떨어트린 후에 그 반지로 눌러 누가 보냈는지를 증명 하였다고 합니다. 연한 살구색의 돌(이름은 잊어 버렸는데요)에 문패가 새겨져 있는 금반지였습니다. 저는 대개 푸른색이나 녹색에 새겨진 반지만 보았는데 그것도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었습니다. 90회 생신으로 정말 의미 있는 선물을 주신 것이지요. 우리 딸은 고등학생 때 견진성사를 받으면서 남편이 시어머니 쪽의 반지를 선물로 주었습니
다. 성인이 된 지금 그것이 가문을 나타내는 표시이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항상 끼라고 신신당부 합니다. 우리 청을 들어주면 밑지는 것 같은지 그래도 무슨 행사 때나 특별한 날에는 꼭 끼고 나타나더군요. 말 잘 듣는다고 호들갑을 떨면 빼어 버릴까봐 모르는 척하며 슬쩍 내려다보고 시선을 돌립니다. 상전이 누구인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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