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아일랜드 요리강습 팀원들과 함께.
그렇게 롱아일랜드와 융화가 되면서도 저는 딸의 한국말을 늘게 하려고 혹시 그 동네에 한국집이 있나 하고 찾았습니다. 우연히 투표 날 우리 동네에 한국 이름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다릴 새도 없이 무조건 찾아 갔습니다. 어리둥절해하며 문을 연 여자는 머리를 슬쩍 꼬은 듯하면서도 느슨하게 뒤로 올린 고상하면서도 이목구비가 큼직한 상당한 미인이었습니다. 고은 피부에는 단 하나의 티끌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 여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야한기가 있는 듯 없는 듯 스쳐 가기도 하였습니다. 분명히 분위기가 있는 그림 속의 여인상 같았습니다.
그분이 바로 뉴욕 일대에서 상당히 알려진 화가 이여란 씨였는데 그 집은 다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 뿐이라 해서 둘이 쳐다보며 웃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딸 대신에 그림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제가 오히려 친구를 찾은 셈이 되었습니다. 두고두고 그 후에도 생각한 것이지만 그분은 동서양을 통털어 드믈 게 보이는 미인이었습니다. 나두 그렇게 생각해 라고 남편도 동의하더라구요. 얼굴만 미인이 아니라 마음씨도 어찌나 고운지 중풍으로 드러누운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모시면서도 단 한 번의 불평을 하는 것도 없고(믿을 수 없으시죠?) 얼굴을 찡그리는 일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그림이 없었으면 그분은 미쳤을 거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친구나 아는 사람들에게도 어찌나 정성을 들여 잘해주는지 저는 그때서야, 야, 친구들에게 저렇게 잘해줄 수 있는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집 전체의 구석구석이 예술가의 터치가 보이고 심지어는 부엌 바닥도 군데군데 당근, 무 같은 야채 그림을 그려 단순한 부엌에 운치가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뿐인 줄 아셔요? 거기다가 요리 솜씨도 상당 하였습니다. 그분이 만드는 빈대떡은 보통 사람이나 요리 집에서 만드는 빈대떡 같지 않고 날아갈듯이 가벼웠습니다. 빈대떡이 이렇게 맛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놀랠 정도였습니다. 처음에 저에게 말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여 해 보았는데 아무리 해도 여란씨처럼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요리 강습이 필요하지요.
하루는 만드는 것을 보아야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당근과 무 그림을 밟고 서서 만드는 것을 구경 하였습니다. 여란씨는 불린 녹두 갈은 데다가 조개와 새우를 넣고 지진 베이컨 다진 것과 채친 호박도 넣었습니다. 번들거리는 따끈한 철판에 한 수저 떠넣으니 건더기는 제 자리에 남고 물크덩한 반죽이 지글거리며 가장 자리로 레스처럼 번졌습니다. 한 입에 쏙 넣을 수 있도록 작게 만들더군요. 뒤집기 전에 딜(dill)이라는 모양이 아주 예뿐 허브를 한 닢 찢어 얹고 붉은 피망 자른 것을 한쪽 붙여서 뒤집었습니다. 노릇하게 지져진데다가 파릇파릇한 딜 모양이 그대로 살아남아 보기에도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모든 것을 예술적으로 보는 여자이니 그 평범한 음식을 그분이 한 차원을 높여 놓은 셈이지요. 상에 앉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금방 덜어낸 빈대떡으로 저도 모르게 젓가락이 갔습니다. 갈은 녹두의 약간 깔깔한 질감을 느끼면서도 날라갈듯이 가벼운 빈대떡 이었습니다. 고소한 맛이 여운을 남겼습니다. 부치자마자 뜨거운 것을 입을 실룩거리며 계속 집어 먹었습니다. 정작 점심을 먹으려고 상에 앉았을 때는 결국 그저 먹는 시늉만 하게 되었습니다. 해를 거듭하며 여란씨를 알면서 저는 그분의 그림을 보며 침을 흘렸고 드디어 우리가 사는 동네를 연상케 하는 그림을 보았을 때는 마치 저를 위해 그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그림은 추상화인데 약간의 콜라주(캔버스 위에 다른 재료를 붙여 질감은 낸 것)를 겸한 것이었습니다. 모래를 붙여 질감을 다르게 하였고 늘어선 집이 보였고 찢어 붙인 그물 밑에는 물고기를 볼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우리가 사는 동네 얘기를 담은 것 같은 친근감이 생겼습니다. 이름을 붙이기도 전이라 저는 해변가의 마을이라고 불렀지요. 그림은 남들이 재는 가치를 따지기 전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다가 나중에 가치까지 올라간다면 뭐 더 좋을 수가 없지만요.
또 하나의 커다란 추상화는 세모, 네모, 둥근 모형에 붉은 빛이 주로 많이 도는 그림이었습니다. 참 놀랜 것은요, 그림은 빛을 내는 곳이 따로 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해변가의 마을은 리빙룸에서 환해 보였습니다. 달을 연상케 하는 둥근 원형이 돋보이는 붉은 추상화는(달의 축제라고 이름지음) 리빙룸에서는 빛이 나지 않고 다이닝룸에 갖고 갔더니 거기서는 환하게 보이더라니까요. 표시 나게 그림에서 생기가 돌더라구요. 방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고 별 볼일이 없는 집이 갑자기 훨씬 달라 보였습니다.
둘러보니 이제는 그 멋진 그림에 비해 우리 집 자체나 가구가 너무나 허술해 보였습니다. 돈이 생기면 바꿀 작정을 하고 이사 와서 즉시 산 싸구려 가구가 갑자기 눈에 거슬리기 시작 하였습니다. 하지만 가구는 언젠가 바꾸면 되는 것. 저는 그 멋진 그림을 흐뭇한 마음으로 쳐다보며 수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 그림이 벽에 걸려 있으니 정성들여 새롭게 만든 음식을 내어 놓아도 더 돋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곧 죽어도 스타일이 중요한 우리 남편은 폼을 재고 자기가 고른 술을 설명해 가며 잔에 부었습니다. 그 분위기에서 손님 초대를 하며 살았으니 우리 집은 어느 집 보다도 디너파티가 많은 집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여란씨는 그 동안 제가 한국일보에 쓴 요리교실 칼럼을 보고 다 배우고 싶은 것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룹을 만들테니 요리 강습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그 분은 요리에도 관심이 대단했습니다. 90년경 그것이 제가 요리 강습을 처음으로 시작한 계기가 되었지요. 정말 전혀 생각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그 후 여란씨의 소개로 알파인의 치과의사 부인 은옥씨의 그룹이 시작되었고 뉴욕 북쪽의 부촌 브롱스빌, 스카스데일 부근에서는 성심여고 후배인 신자가 그룹을 만들어 그야말로 본격적으로 요리 강습이 시작되었습니다. 롱아일랜드에서는 교회에서 봉사 활동을 많이 하는 명은씨가 참 열심히 도와주었습니다. 그 외에도 집을 빌려 주거나 열심히 친구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주위에서 열심히 도와주는 사람들이 여럿 있으니 아주 쉽게 번지게 되더군요. 그러지 않아도 꾸물거리는 여자가 지도를 보고 운전하여 찾아 가느라고 쩔쩔맬 일이 또 하나 생긴 것이지요. 요리 강습으로 인하여 제가 그 당시 본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이제 이민생활로 고생하는 사람들
이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도 자리를 완전히 잡은 여유있는 사람들이라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모국이 잘 살아야 그리고 같은 동포들이 잘 살아야 같이 덩달아 올라가는 것을 외국 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이해하지요. 남편에게 학생들의 얘기를 할 때는 보란 듯이 가슴을 펴고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강습을 하면서 저의 학생들이 서양의 어느 누구에게 내어 놓아도 첨단의 음식을 소개하리라고 마음먹고 일을 하였습니다.
가족을 위한 푸근한 음식과 세련된 손님 접대를 위한 음식을 번갈아 가며 가르쳤습니다. 절대로 한국식도 아니고 서양식도 아닌 국적 없는 음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 했습니다. 제대로 배우고 나서 자기네들이 그렇게 하면 물론 아무 상관이 없지만요. 제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꼭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현대 주부들이 모두 시간에 쩔쩔매는 것 아시잖아요? 그래서 음식은 간단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보기 좋아야 하고 셋째 맛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전채요리나 스프로 시작해서 디저트까지 서로 어울리는 하나의 메뉴가 되게끔 해서 가르쳤습니다.
그 사람들은 요리를 배우겠다고 모였지만 저는 요리 강습을 통해서 참 좋은 여자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배워야겠다고 모인 진보적인 여자들이기 때문에 괜찮은 여자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모두들 열성이 넘쳤기 때문에 저는 더욱더 열심히 가르치려고 하였지요. 봄에는 새로 나온 아스파라가스로 만든 음식을, 여름에는 더위를 시원하게 가시는 가스파쵸 스프와 맥주를 넣고 익히는 바다 가제를 소개 하였습니다. 그렇게 익히면 가제 살이 아주 촉촉하고 연하거든요. 가을의 호박 스프를 서브 할 때는 생호박을 잘라 그 안에 스프를 담았고 호박 밑에는 낙엽을 깔아 운치를 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겨울에는 푸근히 온기가 온몸에 스며들게 하
는 구운 고기 덩어리 만드는 법을 소개 하였습니다.
저의 학생들은 자기네 아이들이 이제는 우리도 보통 음식 먹는다 고 좋아하는 얘기, 많은 손님 접대를 잘 치른 이야기, 학부형 모임에 요리를 해가서 인기 있었던 얘기를 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가르친 것을 잘 이용하는 것을 보는 것이 그렇게 즐거웠습니다. 그러니 요리강사의 일이야 말로 제에게 너무나 잘 맞는 천직이라고 생각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간혹 저에게 아니, 요리를 그렇게 척척 잘하니 얼마나 좋으세요? 라는 말을 합니다. 아니 척척 이라니요! 모르시는 말씀. 저는 워낙 꼼지락 거리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나마도 배웠기 때문에 이만큼 하는 것이지 안 그랬으면 아무 것도 못하고 완전히 깔고 뭉갤 사람. 그게 바로 접니다요. 강습이 있는 전날엔 준비 하느라 동동 거리며 정신 나간 여자가 된 것은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멀리서 강습이 있을 때는 돌아오는 길에 졸음이 와서 창을 열고 노래를 씩씩하게 부르기도 하였고(아이구, 완전 음치) 정 안되면 차를 고속도로 옆에 세우고 눈을 붙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경찰이 와서 금지된 구역에 왜 차를 세웠느냐는 문초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선잠에서 깨어 멍청한 표정으로 푸스스 일어나는 제 모습. 상상하실 수 있으셔요? 다듬은 생선이 담긴 통을 고스란히 현관에 두고 잊어버려서 도착 한 후에 부리나케 다시 사러 나간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느림뱅이인(게으름뱅이는 절대 아님) 제가 배우고 또 배워도 끝없이 깨가 쏟아지는 것을 발견했으니 천만다행 이라는 말이 바로 저를 두고 하는 말이지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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