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시민권 선서식에 갔다. 늦깎이 시민이 되던 초가을날 오후, 6,000여명의 동료 이민자들과 함께 LA 컨벤션센터에서 난생 처음 경험하는 의식을 통과했다.
정부도 비즈니스에 나서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인가. 컨벤션센터 앞에선 글렌데일시 직원들이 미국 시민의 특권 중의 하나라는 ‘독수리 여권’을 자기들을 통해 신청하면 수수료 10%를 깎아준다고 적힌 광고지를 나눠주느라 바쁘다. 신성한 ‘새 시민 탄생’의 현장이기 때문이었을까. 선서식장에서 나눠주는 미니 성조기에도, 한 남자가 팔고 다니는 시민권증서 커버에도 ‘Made in China’가 아닌 ‘Made in USA’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오, 놀라워라!
긴 줄 중간에 서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 영주권과 선서식 통보 편지를 보여주고 행사장에 입장했다. 맨 먼저 한 일은, 너무 젊어 낯선 느낌이 드는 청년의 사진이 박힌 영주권을 반납하는 것이었다. 자리에 앉은 후에도 1시간 분량의 인내심을 더 키워야 했다. 그동안 이민국 직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유권자 등록 서류를 나눠준다. LA카운티 유권자 등록국이라고 적혀 있어 ‘거주지가 다르니 나중에 오렌지카운티에서 해야지’라고 생각하고 받지 않았다. 하지만 퇴장할 때 물어보니 그냥 자신들이 접수해 OC 유권자 등록국으로 보내면 된다고 한다.
드디어 선서식의 막이 오른다. 부시의 영상 축하메시지가 화면에 뜨고, 한 여성 소프라노가 국가 ‘별이 빛나는 깃발’(The Star-Spangled Banner)을 열창했다. ‘참 아름다운 멜로디야’ 하고 생각하는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노랫말 때문인지 비장한 느낌을 주는 대한민국의 애국가 선율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가슴에 손을 얹고 사회자를 따라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할 때는 시의회 등을 취재할 때 국민의례를 하는 미국인들 옆에서 홀로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를 속으로 읊조렸던 일도 새삼 생각난다.
선서식은 연방 법원의 여판사가 주재했다. 그는 이민국 직원의 요청에 따라 원하는 사람은 이름을 바꿀 수 있도록 허락한다고 말한 뒤 연설을 시작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나는 미국에 이민 와 1962년에 시민권자가 되었다. 두 아이의 엄마로 낮에는 비서 일을, 밤에는 공부를 하는 생활을 오래 이어갔다. 커뮤니티 칼리지, 주립대학, 법대를 거쳐 판사가 됐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품었던 ‘시민권 선서식을 주재하는 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룬 것이다. 모두 미국에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야말로 ‘미국은 기회의 나라’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산증인이다. 큰 꿈을 꾸고, 그것을 향해 전력투구하는 사람에게 한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히스패닉이 대다수인 새내기 시민들은 영어 실력이 보통 아닌가 보다. 용기를 북돋워주는 연설을 들으며 감동적인 내용이 나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우레 같은 박수를 친다. 아울러 성조기 깃발을 흔들어대 행사장을 수만 개 별들이 일렁이는 바다로 만든다.
식이 끝나고 진정한 의미에서 ‘코리안 아메리칸’이 되었다. 시민권 증서를 받으며 ‘이젠 선거에도 꼭 참여하고 국민의 의무도 다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난달 프레즈노의 한 맥도널즈 식당 앞에서 만난, 어린 시절 한국의 교정에서 흔히 보던 그 품종을 빼어 닮은 무궁화가 떠오른다.
한인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방에 심긴 한 그루 무궁화다. ‘무궁화는 어디를 가나 무궁화’다. 하지만 이식된 땅에서도 튼실하게 뿌리내리고 살 때라야 비로소 백의민족 고유의 기상인 ‘은근’과 ‘끈기’를 내뿜는 참된 무궁화가 될 수 있다.
10월1일 이전에 시민권 신청을 하면 난이도가 높아지는 새 시험 대신 기존 시험을 치를 수 있다는 소식이다. 시민권을 따고 미국 땅에 뼈를 묻을 각오로 최선을 다해 삶의 보람을 꽃피우는 한인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김장섭 종교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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