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 필
인터넷 이용차 드나들던 ‘세인트 바나바스’의 사이버 카페에서 이층에 있는 영어 공부반을 소개 받았다.
널직한 홀 안에서 열명쯤의 학생들이 편안한 자세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주 닷새 아홉시부터 시작해서 열한시 십분 전에 끝나니 약 두기간의 수업인 셈이다. 오전의 짧은 시간이라 무리가 없을것같다. 미국 생활 수십년이 되어도, 한국말 쓰는 가족들과 한인들 사이에서 별 불편 없이 지내온 우리들이다.
가끔 겪는 다급한 일들은 자손이나 이웃의 도움에 의존하여 해결할 수 있었기에 등한했던 외국어 공부이다. 더구나 믿을 수 없는 기억력인 기금, 그 효과는 기대치 않고 시작하기로 했다. 지도하는 ‘오하라’선생은 설명을 위한 즉석 삽화도 잘 그려서, 멋진 시청각 교육으로 학생들을 만족시켰다. 또한 그 민족성의 장점인 상냥하고 친절한 매너와 재치로 우리를 자주웃겼다. 중간의 휴식 시간에도 간단한 ‘티타임’을 마련하게 도와주었는데, 요사이는 가벼운 간식과 따끈한 차를 곁들인 즐거운 교제시간으로 진전했다. 열명 안팎이었던 정원 미달의 학급도 그 두배가 훨씬 넘는 인원으로 늘었다. 퇴역 장성인 한의사, 강단 습성이 몸에 벤 전직교사, 그리고 도양화를 사서하는 노스승에 은퇴한 치과의사와 약사 출신의 은퇴 자영업자 등,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던 노인들의 학습장이다. 잊었던 예전의 문법을 깨우치고 새 어휘 익히면서 안배된 여유시간을 즐기는 것이다. 젊은 선생의 상큼한 인도로 호흡이 고르게 익어갈 무렵부터, 달마다 생일잔치도 합동으로 축하한다. 절대 다수인 한식 위주의 식단인데 국적에 상관없이 모두 잘 소화한다.
생일 케익은 기본이지만, 떡과 김밥 잡채와 닭고기 그리고 묵 나물등 전형적인 우리 기호 식품인데도 다들 좋아한다. 갈비 불고기 등도 선호하는 국제적 식성이다. 수업시간에 우리의 대표적 음식으로 비빔밥을 자주 올리는 선생의 뜻을 헤아려서, 종강하는 날에 시식할 기회를 가졌었다. 투박한 용기에 예쁘게 담겨진 색색의 나물에 식욕이 동하기도 했겠으나 뜨고운 돌솥밥을 고루 비벼가며 거뜬히 비우는 실력에 놀랐다. “정말 맛있었어요.” 그로부터 몇번 더 비빔밥 회식을 즐겼다. 어느날의 휴식 시간이었다. ‘오하라’ 선생이 내게 물었다. “코리안 쏘세지 있잖아요” 조심스레 하는 말을 금방 알아듣지 못했으나 곧 이해했다. “(설마) 먹을 수 있겠어요?” 끄덕이는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려있다. “그럼우리 가보죠” 그래서 방학 전날에 우리는 ‘순대’ 전문식당의 넓은 홀에 자리를 잡았다. ‘순대 모듬 접시’와 ‘순대국’등을 주문했는데 뒤에 보니 국물이 많이 남았다. 내 입맛에도 개운치 않은 음식이어서 그러려니 했더니 “배가 불러 더 먹지 못했어요” 한다. 배당된 ‘코리안 쏘세지’ 접시는 깨끗하다. 생각보다 소탈한 식성에 우리는 감탄했다.
나이 든 제자들의 배려를 어색해 하지않는 그의 성품이 또한 편하다. 오랜 세월 속에 쌓인 민족적 앙금을 의식할 수 없는 순수한 가르침과 허물없는 인격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ESL Class의 출석이, 단조로운 일상에 바람직한 무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간 지병으로 돌아가신 한분 외로 반원 모두가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고 있어 당분간 회목한 이 분위기는 지속될 것이다. 정부 혜택을 선용하면서 부담없이 어울리는 주 닷세의 오전시간에서, 우리는 또다른 의미의 흥겨움을 얻기도 한다. 비슷한 시대를 경험했던 역사의 증인들이 피력하는 경험과 사상이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탄없이 마음을 여는 대화를 속 시원히 나누는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음도 축복이다. 칠십 마일로 달린다는 빠른 나날이지만, 심신의활력에 도움되는 이 수업시간을 기쁘게 긍정하면서 주어진 여건에 감사한다.
한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린다지만,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조금씩은 자라겠지. 다음의 ‘Socoro’(외국인)생일엔 그나라 음식을 준비하고 그들 내외의 가벼운 춤사위도 곁들이는 깜짝 변화를 연출해볼까.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갖은 나물이 알맞게섞여 따뜻하고 고소한 맛으로 은은한 정감을 유도하는 비빔밥은, 다민족이 어울리는 세계화의 시점에서 정말 적절한 음식이라 여겨진다. ‘오하라’선생의 기호에 따르다가 자연스레 가까워진 비빔밥에 새삼 애정이 간다. 다음 회식에도 빠지지않을 메뉴가 될 우리의 비빔밥을 즐겁게 기다리고 있다.
이인숙
한국수필 신인상 당선. 미주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입상. 미주크리스찬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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