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뭐야. 쪼글쪼글하잖아.”
태어나 처음으로 봉숭아 꽃물을 손톱에 들인 아이의 뾰로통한 첫마디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당연하다는 듯이
“처음엔 다 그래. 시간이 지나서 손톱 주변에 든 물이 빠지면 예뻐질 거야.”
알은 체를 하고 큰소리를 쳤지만 아마 일주일은 족히 걸리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열손가락을 쫘악 펴고 요리조리 보며
“이게 예뻐? 예쁜 거구나. 근데 정말 안 지워져?”
연달아 종알종알 질문을 해댄다.
지난여름 어느 지인의 집 담벼락 아래 숨은 듯 핀 봉숭아꽃 한 무더기를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한국에서야 여름이면 길거리, 동네 어디서나 흔하게 지천으로 볼 수 있는 봉숭아를 산 설고 물선 미국의 한 작은 도시, 그것도 정원 한가운데 관상용이 아니라 주차장에 가로막힌 콩크리트 담 아래에 붙은 한 평 남짓 되는 땅에 옹기종기 모여 친근한 모습으로 피어 있는 걸 보니 어느새 마음은 태평양을 건너고 시간을 거슬러 아련해진다.
둥글넓적한 자갈에 꽃잎을 놓고 꽁꽁 찧어 작게 조물거린 후 조심스레 집어 손톱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비닐봉지를 길게 잘라 움직이지 않게 감고 명주실로 단단히 묶는 과정을 누구에게 처음 배웠는지 기억은 없다. 집안 언니가 처음 해주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 후 몇 번은 아빠가 묶어주시며 피가 안통하면 아플 거라는 걱정을 하시면서도 손수 백반도 구해다 넣어 주시고 동트기 전 새벽에 먼저 일어나 가만히 풀어 주시던 기억도 난다.
엄마 손톱 위에서 반짝거리며 빛나는 메니큐어 만큼 예쁠 거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색깔이 흐릿하고 손톱 주변 살이 온통 얼룩지는 몇 번의 실패 끝에야 비로소 비가 온 후 딴 봉숭아는 색이 곱게 들지 않는다든가, 꽃보다는 이파리를 넣어야한다든가, 식초, 설탕 등 여타 다른 첨가물보다 백반이 그 결과에 있어 탁월하다든가, 묶기 전 손톱 주변에 바세린을 발라주면 쪼글거리거나 필요 없는 부분에까지 색이 번지지 않는다는 비법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즈음해서 나의 봉숭아 꽃물들이기에 대한 관심은 서서히 시들해 지고 있었다. 겨울이 그다지 춥지 않고 눈이 흔치 않은 곳에 살았던 탓에 첫눈 오는 날까지 봉숭아 꽃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그 낭만적인 이야기를 뒷받침할만한 기억은 없다, 그저 작은 손톱 끝에 간신히 매달리듯 남아 있던 꽃물이 가녀린 초승달처럼 사라지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예전엔 봉숭아가 사악하고 나쁜 기운을 쫓아낸다고 믿었대. 그래서 간장이랑 된장 넣어 두는 항아리가 모여 있는데 있지? 그래 장독대, 그 근처에 많이 심었대.”
“왜?”
“그야 우리 선조들은 먹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랬지. 아무거나 먹지 않았고 때에 맞춰 기다렸다가 거두고 자연의 시계에 맞춰서 음식을 먹고 그 땐 음식이 곧 약이기도 했으니까. 요즘과 비교하면 얼마나 현명한 거니?”
듣는 둥 마는 둥 심드렁하게 묻던 아이가 나쁜 기운을 쫓는다는 말에 신기하다는 듯 자기 손톱을 쳐다본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한다. 태평양이라는 회수를 건넌 나는 보잘 것 없는 탱자가 아니라 유자이고 싶다. 내가 보고 듣고 자라면서 심성의 자양분이 되어준 어린 시절의 기억과 경험들, 소중한 내 나라의 문화가 딸아이와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향긋한 유자의 향으로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양한 색색의 반짝거리는 메니큐어보다 보기에 따라 칙칙하고 촌스럽기도 한 봉숭아 꽃물을 보고, 자기와 기억의 안뜨락을 같이 하고 싶은 엄마의 심중을 이해해 주려는 듯 금세 마음을 바꿔 예쁘다고 말해주는 딸아이가 고맙기까지 하다. 그리고 담벼락 밑 작은 땅을 일구고 봉숭아 씨를 내어 뿌리고 여름내 물을 주고 가꾸어 내 기억 속의 소중한 봉숭아 씨 주머니가 터질 수 있도록 해준 그 손과 정성에도 감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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