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쿠, 징그러워라! 이따위 잔인한 짓은 다신 안 해!”
김지하는 이 한마디를 하고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먼동이 터오는 새벽이었다. 1985년 충북 청주. 불문학자 전채린의 작은 아파트에서 한 후배 시인과 저녁 8시에 시작한 노래 시합은 그렇게 끝났다. 밤을 새운 가요대결 현장에는 소설가 김성동과 철학자 윤구병이 밤새 맞장구를 친 주석(酒席)의 흥취가 낭자했다. 전날, 무심천의 국밥집에서 김성동과 소주로 배를 불린 김지하는 노래를 끝내준다는 후배 시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조용필을 꺾은 김지하의 얼굴엔 이 아무개라는 시골촌놈이 해봐야 얼마나 하겠느냐는 자만심이 넘쳤다.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나면 1분 안에 이어 불러야 하고, 한번 부른 노래를 다시 부르면 실격하는 등 엄격한 룰을 세운 대결이었다. 소주를 마시며 서로가 주고받은 노래는 쉬지 않고 이어졌고 마침내 김지하는 완패를 선언했다.
김지하 시인과 노래 대결 일화
한국 문단의 歌客 이동순 시인
‘노래로...한국 현대사’ 1일 강연
한국 문단의 전설적 가객(歌客), 이동순 시인(57)이 얼마전 워싱턴을 찾았다. 시인은 연구년(옛 안식년)을 맞아 지난 9월부터 메릴랜드 솔즈베리의 지인 집에 머물고 있다. 낚시와 산악자전거 타기로 소일하고 있다는 시인을 불러낸 건 역시 노래.
그는 내달 1일(토) 저녁 7시 미주한국시문학회(회장 권귀순)이 마련하는 ‘노래로 들어보는 한국 현대사’ 무대에 선다. 애난데일의 코리아 모니터 갤러리에서 그는 한국가요에 숨은 사연과 유명 작곡가, 작사가들에 얽힌 일화 보따리들을 풀어낼 예정이다. 물론 아코디언 반주에 김지하를 꺾은 절창을 곁들여서다.
문학보다 노래로 세상을 이야기하려는 이동순. 시인의 일탈은 그리움에서 비롯됐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고달프고 외로운 시골소년의 삶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큰 위로가 됐어요.”
남인수, 백설희, 백년설, 송민도… 50년대 미제 진공관 라디오를 장악한 그들의 노래를 듣고 나면 아련한 그리움이 금세 밀려왔다. 그는 어느덧 헤로인 중독자처럼 ‘딴따라’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중학교 시절 친구집은 뮤직박스였다. “남편을 일찍 잃은 친구 어머니 취미가 노래 듣는 거였어요. 당시 LP판이 300장이나 돼 그걸 빌려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귀가하면 노래를 듣고 가사를 노트에 옮겨 적으면서 외웠지요.”
그는 지금도 가요 300곡쯤은 노래책을 보지 않고도 3절까지 가사를 다 기억한다.
노래는 시인의 부업이 됐다. 그의 절창이 알려지면서 술자리는 물론 여기저기서 청탁을 했다. 모 시사지에 ‘재미있는 가요 이야기’를 1년간 연재하며 서울 이야기꾼들의 화제가 됐던 적도 있었다. 2003년부터는 대구 MBC 라디오에서 ‘이동순의 재미있는 가요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에세이 <번지 없는 주막>도 펴내 한국 가요사의 잃어버린 맥을 되찾는 노력을 하기도 했다.
그에게 노래는 혼곤한 우리의 삶을 똑바로 서게 하는 힘이자 역사를 반영하는 리얼리티다. 시인은 대학시험에 낙방하고 산촌 골방에서 웅크리고 불렀던 노래들이 그에게 힘과 용기를 회복시켜주는 활력소가 됐다고 되짚는다. 덧붙여 “우리 가요는 굴곡과 사연도 많았던 한국현대사의 험난했던 과정을 그대로 반영하는 문화적 산물이며 마음속 아픔까지 담아내는, 역사를 반영하는 리얼리티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시보다 노래실력으로 더 유명하지만 그의 문학은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삼십여년간의 문력(文歷)을 쌓아온 깊이만큼이나 빛을 내고 있다. 십여권에 이르는 시집과 문학평론집들은 이 작가의 기품과 모성에 대한 그리움, 따뜻한 세상을 향한 희구를 절절히 담고 있다. 천재 서정시인 백석을 한국 시사에 복원시킨 이도 그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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