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돈, 돈
미국은 언제나 여행지였다. 들뜬 마음으로 먼 곳으로의 여행을 준비했고 미국에 와서도 늘 새롭고 흥미로운 볼 거리와 할 거리를 찾았다. 여행 소개지에 있는 장소를 한 곳이라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시간을 쪼개어 돌아다녔고 평소에는 감히 엄두도 못낼 공연도 가서 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주 보는 것도 아닌데 기왕이면 좋은 자리에서 보아야지 하면서 아껴두었던 큰 돈을 써가면서 말이다.
여행이 아닌 삶을 살기 위해 미국에 온지 벌써 일년이 넘었다. 큰 벌이 없이 한국에서 가져온 돈으로 빠듯하게 살림살이를 하다보니 영화 한편도 제대로 보러간 적이 없고 외식 한번 폼나게 해본 적도 없는 듯 하다.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학교, 일터, 집을 맴맴 돌며 밋밋한 일상을 반복하자니 너무나 세상이 덧없어 보인다. 다른 건 몰라도 좋아하는 여행은 포기할 수가 없어 지난 봄, 아들의 컬리지 투어를 핑계 삼아 꿍쳐놓았던 비상금을 털어 동부 나들이를 다녀왔다. 하지만 오랫만의 집 밖 나들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면 돈을 아껴볼까 그 궁리에 무얼해도 그리 즐겁지가 않았던 듯 하다.
돈, 돈, 돈. 매일 돈 걱정이다. 환율은 매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주식은 반도막이 났네 어쩌네 다들 죽는 소리이다. 들어오는 돈은 계속 줄어들고 나가는 돈은 끝도 없이 늘어난다. 내가 어찌해서 해결이 날 일들도 아니니 부디 아들의 대학 등록 전까지만 모든게 제 자리를 찾아주길 간절히 바라며 씀씀이를 줄여보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미국 경기마저 공황이래 최악이다 어쩌다 하며 모두들 힘든 소리를 하니 이곳에서 자리를 잡기도 만만치 않고 이러다가 정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함에 잠도 잘 오질 않는다.
어제는 장을 보러 그로서리 스토어엘 갔다. 꼭 필요한 물건들만 사야지 했는데 이리 저리 둘러보다 보니 괜시리 장바구니로 밀어넣게 되는 사치품들이 생긴다. 그로서리 스토어에서 사는 물품이 금은보석도 아닐진데 사치품이라는 이름을 앞에 달자니 내 처지가 좀 비참하다 싶기도 하지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사치품이 아니고 무엇이랴. 넣었다 뺏다를 반복하고 있는데 아들 녀석이 과자 봉다리를 한웅큼 가져다 넣는다. 돈도 없는데 몸에도 안좋고 꼭 안 먹어도 되는 과자를 왜 그리 갖다 넣느냐고 마구 화를 내었다. “사치품 과자!!” 필요없는 것을 가져다 넣었으니 과자도 사치품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깟 과자가 몇 푼이나 한다고 그리 언성을 높였는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말로는 돈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하면서도 결국은 이게 다 돈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드민다. 불편하지 않은 정도로만 있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여러 해 전 부모님의 사업이 곤경에 처하게 되어 세상의 전부가 돈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낀 적이 있다. 돈 때문에 울고 돈 때문에 싸우고 모든 불화가 돈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것이 돈에서 시작된게 아니란걸 깨닫게 되었다. 그닥 어려움 없이 살다보니 진정한 사랑과 믿음이란 카드를 가족사이에 꺼내어 들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려운 일을 겪고 보니 오히려 돈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다행히 오랜 시간의 마음앓이 끝에 이전같이 풍족하고 여유롭지는 않으나 가족들이 서로 챙기고 돕는 마음을 찾게 되었다. 누군가는 좀 더 희생을 하여야 하고 누군가는 좀 더 힘들어야 하지만 그래도 가족이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이기에 참아낼 수 있음을 터득한 것이다.
황금만능의 세상에서 펑펑 쓰지 못하고 살아야하니 모든 것이 각박하고 힘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기에 따뜻한 지붕아래서 맛있는 밥 먹으며 가족들과 웃음을 나눌 수 있는 행복을 가졌으니 가끔씩 ‘내게 돈이 더 많았으면……’하고 드는 미약한 인간으로서의 욕심은 꼬옥 꼭 눌러 버리고 살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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