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의 서녘하늘 붉은 노을이 곱다. 모처럼 여유 속에 시인 정호승의 산문을 읽다가 다음 글에서 멈칫 선다.
색채는 빛의 고통이다. 이 한 마디를 읽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아렸습니다. 이 말을 누가 했다는 것은 (문호 괴테가 한 말입니다만) 이미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모든 색채가 빛의 고통에 의해 이뤄진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빛에게 고통이 있다면 어둠이라고 생각했으나 빛의 고통은 오히려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책을 내려놓고 시인의 충격을 생각해본다. 물론 나도 이 세상의 모든 색깔들이 빛에 의해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어머니가 도시락에 넣어주셨던 빨간 능금, 아내가 그린 요세미티 계곡의 연초록 숲, 금문교 너머 갈치등 같이 반짝이던 바다. 이 아름다운 색채를 내기 위해 빛이 그토록 고통스러워했음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왜 색깔은 빛의 영광이 아니고 고통일까? 허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색깔은 빛의 산고(産苦)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게 사실이다. 하얀 태양 빛은 그 속에 ‘빨주노초파남보’ 파장이 다른 모든 색깔들을 한 띠에 품고있다. 가시광선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은 적외선, 자외선 같은 광선에너지도 품고있다. 이 색깔들이 선명히 드러나려면 햇빛이 프리즘이나 물방울 같은 매체 속을 통과하며 허리를 꺾는 굴절(屈折)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빛의 고통은 이것만이 아니다. 흰빛은 사물을 비출 때 스스로를 죽이고, 그 사물의 고유한 색깔만 드러낸다. 빛이 사과를 비추면 오직 빨간 색 파장만 반사하고 다른 색들은 사과원자 속으로 흡수시킨다. 그래서 사과는 빨갛게 보인다. 빛은 자신을 감추고 자기가 비추는 대상의 빛깔(개성)만 드러낸다. 빛의 희생적 고통 없이 이 세상 어느 것도 아름다울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그런데 빛의 수고는 사물의 아름다움만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현란한 꽃 색깔을 보고 벌과 나비들이 날아와 사랑을 교감한다. 푸르고 무성한 나뭇잎 속에 설렘을 안고 산새들이 둥지를 튼다. 그래서 새 생명이 잉태되고 탄생한다. 빛은 광자의 파장을 절묘하게 조절해 색상을 드러내고, 밝기(명도)와 농도(채도)를 살려 생명의 매력과 힘을 입체화시킨다.
빛의 생명력은 참 구체적이다. 광합성이 그 증거다. 식물들은 햇빛의 생명력을 받아 이산화탄소와 물을 포도당과 산소로 만든다. 산소는 가장 중요한 생명소임은 말할 것도 없다. 식물 속에 쌓인 포도당도 수억 년 뒤 석탄이나 석유 같은 화석연료로 다시 태어난다. 빛은 스스로 고통을 감수함으로 생명을 살린다. 그래서 빛은 생명이다.
그런데 궁극적인 빛의 고통은 어둠과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 어둠의 세력은 끊임없이 빛에 도전한다. 현세대의 가장 심각한 물리적 어둠은 자연의 생명력을 죽이는 환경오염일 것이다. 지구 온난화가 가속될 수록 빛은 더욱 고통할 것이다.
인간들의 영적 어둠도 깊어지고 있다. 사람들 마음속에 시기, 탐욕, 교만, 증오 같은 죄성들이 날로 심해진다. 올해도 세상은 분쟁과 경제파탄으로 얼룩졌다. 어둠을 이길 수 있는 건 빛밖에 없다. 다만 빛의 생명력은 고통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내 삶의 고통이야말로 날 성숙케 하는 생명의 요소라는 깨달음이 온다. 세상의 아름다운 색깔들도 빛의 고통을 통해 이뤄지는데, 보잘것없는 나도 고통을 통해 인간이란 색깔을 지닌다는 게 너무 당연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연이나 인간의 색깔이 모두 빛의 영광이 아닌 아픔의 열매란 사실을 묵상한다. 노을이 시리도록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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