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밥을 볶아 아이들과 간단히 저녁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감자도 깎고 당근도 썰고 김치도 쫑쫑 잘라 넣고 달걀도 섞어 한 접시씩 식탁에 올려 놓았다. “볶음밥 안 먹을래요. 맨 밥 주세요!” 고집 센 네 살짜리가 앉으면서 한 말이었다. 그냥 먹자, 엄마가 맛있게 만들었쟎아. 내일 아침에 새 밥 해줄께. “싫어! 맨 밥! 맨밥 줘~!” 여기서, 엄마인 내가 한 숨 고르고 양보하면 일은 쉬워진다. 하지만 그 날따라 왜그리도 화가 나던지. 고래고래 울면서 끝까지 이기려고 드는 드센 아이 성격을 속속들이 잘 알면서도 번번히 허둥대며 대처하는 나는 결국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그뿐이랴, 전의에 불타 밥솥을 식탁에 소리나게 내려놓으며 “그래, 먹어라 먹어!” 하다가 애꿎은 식탁 유리만 쪼개놓고 말았다. 아깝기도 하고 열도 올라 속이 타는데 이 녀석은 보무도 당당하게 숟가락을 하나 들고 와 밥솥에 꽂고는 조각난 유리쯤은 아랑곳 않고 밥을 퍼먹는 게 아닌가! 아무리 어린 애라지만 내 서슬에 조금은 뜨끔해서 꼬리를 내릴 줄 알았다.
임신했을 때 한 번씩 거쳐갔음직한 코스, 라마즈 호흡법이 실은 아이를 낳을 때 필요한 게 아니라 아이를 기르는 동안 더 필요한 거라는, 잡지 글. 백 번 맞는 말이다.
주변에서 종종 ‘아이를 야무지게 잘 키운다’는 과분한 칭찬을 듣는 편이지만 그게 다 껍데기라는 걸 나는 잘 안다.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것쯤은 살뜰하게 잘 할 자신이 있는데 놀아주고 아껴주고 진심으로 교류하는 일만큼은 언제나 어렵기만 하다.
고등학교 때 주말이면 공부를 핑계로 과자를 한 보따리 싸들고 학교에 가곤 했었다. 아장아장 걷는 귀여운 딸아이를 대동하고 나타난 당직 선생님을 만나기라도 하면, 금새 아이를 능숙하게 안아 올리며 이쁘다고 챙겨주던 내 친구. 그럴 때마다 난 한 발 물러서서 진열장 안의 인형을 구경하듯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었다. 일가 친척들이 다 모이는 명절 때에도 어린 꼬맹이들을 데리고 소꼽 장난이나 학교 놀이를 하기 보다는 큰 엄마나 고모들 사이에 말없이 끼어앉아 있는 게 더 편했다. 어쩌면 나에게는 아이에 대한 본능적인 애정이 별로 없었던 게 아닐까.
무조건 울어대기만 하던 갓난 아기 때에는 말문이 터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말귀를 알아들을 때가 되니 제 고집을 앞세운다. 다시 철이 들기를 기다리고 있자니, 십 대의 사춘기 자녀를 둔 선배 부모들의 한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여자들에게는 모성 본능이 있다? 글쎄다.
적성검사를 해서 진로를 정하듯 부모가 됨에 있어서도, 엄마로서의 적성과 재능이 있는지 미리 알아볼 수 있다면 어떨까.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입양을 할 때 기준이 되는 잣대들처럼 말이다. 그것은 혹시 동성 결혼을 인정하느냐 마냐 만큼이나 시끄러운 문제가 되어 버릴까?
부모가 되는 일은 쉽지만 좋은 부모가 되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인 게 분명하다. 엄마가 되었으니 나는 평생 싫든 좋든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가끔 ‘첫 애가 더 이뻐요? 둘째 애가 더 이뻐요?’ 하고 물어오는 사람에게 ‘둘 다’ 미.워.요.라고 말하는 나는 과연 엄마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들이라고 뭐 나를 엄마로 만나고 싶어서 만났겠는가! 내가 예행 연습 없이 아이들을 만났듯이 아이들도 하루하루 엄마라는 사람과의 전쟁을 치르며 살아가고 있는데.
냉장고에 붙어 있는 ‘훌륭한 부모 이십계명’을 쭉 훑어 본다. 아이의 스트레스 바로바로 풀어주기, 좋아하는 음식 해주기, 작은 일도 축하해주기, 단점보다 장점에 집중하기, 아이가 사귀는 친구들에 대해 훤히 알기,아이의 능력 믿기, 식사 때는 즐거운 얘기 하기, 스스로 모범 보이기… 하나하나 짚어보며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이 축복받은 막중한 역할을 잘 해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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