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7년 겨울 필라델피아 인근 밸리 포지의 겨울은 추웠다. 미 독립군 총사령관인 조지 워싱턴은 1년 내내 연전연패로 지친 군대를 이곳으로 피신시킨 뒤 겨울을 나기로 결정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호기롭게 독립을 선언했던 필라델피아는 이미 영국군의 손에 떨어진 상태였다. 거듭된 패전으로 독립군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고 식량과 무기도 다 떨어지고 신발이 없어 동상에 걸린 발을 잘라내야 하는 병사가 부지기수였다. 워싱턴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대륙의회는 군수품 지원을 중단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마저 돌아 수천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후 지난 1년 반 동안 독립군이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 해 롱아일랜드를 비롯한 뉴욕 전투에서 훈련이 안 된 독립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하늘이 도와 밤사이에 짙은 안개가 깔리지 않았더라면 이들은 강을 건너 도망도 못 가고 궤멸됐을 가능성이 높다.
1776년 12월 워싱턴이 델라웨어 강을 건너 뉴저지의 트렌튼과 프린스턴에서 영국군을 무찌르기는 했지만 이는 상징적인 의미의 승리였을뿐 군사적으로는 결정타가 되지 못했다.그 후 계속 밀리다 밸리 포지에 고립된 독립군의 운명은 풍전등화나 다름없었다. 신생국 미국은 태어나자마자 땅 속에 묻히는 듯 싶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이 고통의 시기를 재기의 발판으로 삼았다. 스스로를 ‘남작’으로 칭하는 프러시아의 교관 프리드리히 슈토이벤이 제발로 이곳을 찾아와 군사들을 제대로 훈련시켰다. 겨울이 지나며 자원병과 물자가 조금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프랑스가 미국 편에 서 영국과 싸우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1777년 패잔병의 모습으로 이곳에 기어 들어왔던 독립군은 1778년 6월 숙련된 정예군의 모습으로 이곳을 떠났다. 많은 사가들은 밸리 포지야말로 미국 군대가 진정으로 태어난 곳으로 보고 있다.
1781년 요크타운에서 독립군이 승리를 거둘 때까지 전투는 3년간 더 계속됐지만 이때만큼 독립군이 위기를 맞았던 일은 없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7월 4일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일은 밸리 포지의 고통과 인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일 취임 연설에서 워싱턴이 밸리 포지에서 한 “희망과 덕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모든 미국인들이 힘을 합쳐 오늘의 위기를 극복해 나갈 것을 촉구했다. 풍요와 기쁨도 그렇지만 빈곤과 고통도 상대적인 것이다. 아무리 지금 현실이 어렵다 한들 신발이 없어 언 발을 잘라내야 했던 당시와 비교할 수는 없다. 당장은 힘들지만 허리띠를 졸라매고 견뎌내면 나중에는 이것도 보람 있는 추억이 된다.
맹자는 “우환 속에 삶이 있고 안락 속에 죽음이 있다”고 말했다. 밸리 포지의 워싱턴과 병사들의 옛일을 떠올리며 우리 모두 지금의 위기를 이겨나갈 각오를 새롭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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