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어른이 돌아가시니 애도의 물결이 깊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선종 소식에 남가주 한인사회도 숙연한 분위기이다.
70년대와 80년대 한국에서 암울한 군사독재 시대를 살았던 사람치고 ‘김·수·환’이란 이름석자를 가슴에 담지 않았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선종은 범국민적 상실감으로 다가오고, 특히 추기경을 가까이서 접했던 가톨릭 신자들의 슬픔은 남다르다.
LA의 박 안젤라씨가 그중 한사람. 그는 “선종 소식 들은 지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눈물이 난다”고 한다. 자영업을 하면서 시인으로, 수필가로 활동하는 박효근·안젤라 씨 부부가 김 추기경을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칠레에서였다.
1972년 칠레로 이민가 산티아고에서 살던 이들 부부는 한인성당이 없는 것이 제일 아쉬웠다. 매주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기는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마음 한구석이 항상 미진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한인 가족들의 모임. 성당에서 미사를 드린 후 박씨의 집에 모여 우리말로 다시 예배를 드리는 모임이었다. 산티아고 전체 한인 20가족 중 7가족이 모임을 갖기 시작한 후 2년 쯤 지났을 때 김 추기경이 칠레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박씨 부부를 비롯한 한인들의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모두 공항까지 마중을 나가고 박씨 집에서 추기경 환영파티를 했다.
“추기경님 옆에서 사진도 찍고 식사도 같이 했는데 그렇게 소탈하실 수가 없었어요. 격의 없이 대해주셔서 큰 오라버니를 만난 듯 친근했지요. 그분이 대통령 만나기보다 더 힘든 분이란 사실은 몇년후 한국에 가서야 알았어요”
그때 김 추기경이 이들의 모임을 ‘대 칠레 한인천주교회’라고 명명하면서 칠레에서 첫 한인성당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업이 의사인 김재동 부제는 김 추기경을 삶의 모델로 삼고 살아왔다. 그의 인생에 김 추기경이 등장한 것은 1969년이었다. 의과대학을 마치고 해군 군의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신문에서 ‘한국의 첫 추기경 탄생’이란 기사를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고 했다.
“당시까지 한국에서 천주교 최고위 성직은 대주교였지요. 그런데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추기경’에 그분이 선출되었다는 소식은 너무도 놀라웠어요”
신혼이었던 그는 “나도 아들을 낳으면 저 분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실제로 그 2년 후 아들이 태어나자 그는 집안의 항렬을 무시하고 ‘김수환’의 ‘수’자를 넣어 아들의 이름을 지었고 영세명 역시 스테파노로 했다.
그후 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 정의의 편에 서던 추기경의 삶, 그리고 추기경의 미국 방문 때마다 가까이서 접하며 받은 인상이 그를 인생의 모델로 삼게 했다고 한다.
“성직자들은 보통 두 그룹이지요. 영적인 삶에만 치중하는 타입과 사회정의 구현에 헌신하는 타입이지요. 김 추기경은 영적 삶에 충실하면서도 사회문제에 귀 기울이신 분,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으셨던 분이지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떠나도 떠나지 않는 분,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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