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초기인 1970년대 워싱턴 한인사회의 생활상과 시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입수됐다.
70년대 반정부 주간지로 이름 높았던 ‘한민신보’를 발행했던 정기용 씨는 이 신문의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모두를 17일 한국일보에 기증했다.
한민신보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표방한 제호처럼 유신의 광풍이 몰아치던 70년대 반(反) 독재의 깃발을 내건 대표적인 해외 반정부 신문. 1970년 1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이후 얼마 뒤 워싱턴으로 옮겨 80년대 초반까지 매주 또는 매월 부정기적으로 발행돼왔다.
정기용 전 발행인은 “청춘을 바쳐 반 유신독재 운동에 뛰어들면서 창간한 한민신보는 내 분신이나 다름없었지만 이제는 한인사회의 공적인 자산이나 마찬가지”라며 “이젠 잊혀진 과거가 돼버린 그 기록과 사료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정신으로 동포들과 고락을 함께 해온 한국일보에 맡기고자 한다”고 기증 취지를 밝혔다.
정 씨가 버지니아 훼어팩스의 자택에 보관해온 ‘한민신보’는 사과상자로 두 박스 분량. 70년 11월 나온 창간호부터 84년 정 전 발행인이 귀국함에 따라 문을 닫을 때까지의 신문들이 망라돼 있다.
정 씨는 “박정희 군사독재는 국내 언론들의 입을 막고 정치적 반대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는 등 인권말살을 자행했다”며 “누군가 해외에서 국가의 정의를 부르짖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에 한민신보를 창간하게 됐다”고 말했다.
타자기로 찍어 만든, 4면 때로는 8면에 담긴 신문의 내용들은 엄혹했던 70년대와 80년대의 분기어린 투쟁의 발자취이자 동포사회 대소사(小事)의 거친 기록이다. 창간호는 ‘교민회에 협조하자’는 사설과 김지하의 시 ‘오적’, 서울의 5개 대학생 선언문 발표 소식, 서강일 선수의 권투소식, 한인사회 토막소식 등이 실려 있다.
일종의 ‘투쟁지’ 성격을 띠면서 반정부 사설과 뉴욕 타임스 등 미 언론의 한국 정부 비판 기사 등이 특히 많았다. 김형욱 전 중정부장이나 영화감독 신상옥의 미 망명 같은 국내에서는 보도되기 힘들었던 정치적 사건의 비사(秘史)도 실려 있어 눈길을 끈다.
‘해외공관원 망명 캠페인’도 흥미롭다. “일류대를 나와 군사독재에 부역하며 네 양심을 팔지 마라”는 내용의 망명 캠페인은 실제 주미 공관원들의 ‘행동’으로 이어졌다.
한민신보가 정부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면서 발행인에 대한 음양의 탄압도 이어졌다. 정보기관에 의한 광고 중단 압력은 물론이고 국내의 가족들에 대한 가혹한 세무사찰 등이 발행인을 괴롭혔다.
정 씨는 “동포들이 음양으로 지지해주고 격려해준 게 내가 좌절하지 않도록 한 힘이었다”며 “특히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남편을 믿고 따라준 아내(정문자씨)가 없었으면 버텨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정 씨는 이와 함께 “오보와 실수도 많아 피해를 본 분들에 아직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며 음악인 안용구 선생의 방북 오보를 대표적인 잘못으로 꼽았다.
정 씨는 한민신보 발행과 함께 유신정권은 물론 신군부의 광주학살 당시 백악관 앞에서 86일간 1인 시위를 하는 등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투사. 80년대 중반 귀국해 한국서민연합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대화를 통해 이념적, 사회적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설립된 ‘자유토론 광장’ 대표로 있다.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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