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군과 시비중 영어실력 장기영 부총재 눈에 들어
1996년 서울에서 경성고등상업학교의 동기 동창모임에서 동기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경성고상은 현 서울대 상대의 전신이다.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
수복후 한은 부흥본부 차출 외환 맡아
수출입 대금·군납 자금 결재까지 관리
업자들 막무가내 돈봉투 오해 사기도
1951년 서울 수복 후 한국은행에서 임시 부흥본부를 설립하는데 시중은행들에 중견직원 두어 명 정도 차출 요청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한국은행은 전에 근무하던 만주 중앙은행이니 특별히 참여의식도 살려볼 수 있다고 느꼈다. 남달리 잘 왔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다른 은행에서 온 이들도 사귀게 되었다. 물고기가 자기 강물에 돌아온 것도 이런 것일까.
한국은행이 임시 부흥본부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중공군의 후원을 받아 북괴가 남쪽으로 반격을 가해 왔다. 1.4후퇴를 겪게 된 것이다. 각 기관들도 거의 다 부산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 부산시대에 나는 한국은행 외국부의 외환과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한은의 외국부는 원래 나라의 외환업무를 전담하던 조선 환금은행을 몇 해 전에 인수합병한 곳이었다.
그 전신은행에서 편입된 직원과 조선은행 자체 직원 중에도 적격자가 있었을 텐데 나처럼 외부에서 갓 들어온 신출내기에게 외환과장이라는 중책을 맡겼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라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는 부산 교두보에서 국가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시기에 민간부문의 물자공급의 유일한 파이프라인인 외환거래를 총괄하는 외환과, 그곳이 지닌 책임이 여하한 것인가 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잠시도 곁눈을 팔 새도 없이 폭주하는 업무처리에 동료들을 독촉하며 달래며 안간힘을 다하며 허우적거렸다. 다행히 위에 모신 김기엽 외국부장이나 아래 대리들도 한결 같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합심협력해서 그날 그날 밀려드는 업무를 지체 없이 처리해 나갔다.
우리 팀의 밤낮을 가리지 않는 헌신적 노력 없이는 그 중대한 국가의 민간 물동사업이 차질 없이 운영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먼저 많은 희망 후보가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중요한 외환과장직이 외인부대의 한 사람인 나에게 맡겨졌다고 했다.
이런 결정에는 당시 한국은행의 조직편성을 도맡아 하던 장기영 부총재의 결단이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안다. 그의 그런 결정에는 미숙하나마 나의 영어 구사력이 평가받은 면도 있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어느 날 저녁에 임시본부 직원들이 회식을 가졌는데 회식 후 귀가 길에 취한 미군 몇 사람과 부딪힌 일이 있었다. 우리 팀과 시비가 붙어 제법 난처한 상황이 되었는데 성급한 장 부총재가 “뭐라고 말들을 해. 뭐라고 해야지”하고 소리를 지른다. 내가 나섰다. 그런데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들과 뭔가 말을 주고받아 양해가 된 듯 서로 악수를 나누며 헤어졌다.
이런 작은 일이 장 부총재로 하여금 나를 발탁하게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까. 그와 가깝던 사이도 아니었기에 그런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그가 나라는 인간 전체를 ? 그런대로 수개월 동안의 부흥부 시대를 통해 ? 좋게 보았던 것이 아닐까.
외환과는 당시 중요 수입국인 일본에서 협정서의 발행으로 물자구매에 대한 대금지불을 담당해 주는 것을 주요 업무로 했다. LA란 신용장(Letter of Credit)도 있었는데 이는 일본과의 거래를 위해 특별히 붙여본 것이다. 그때의 대한민국의 외국환 취급 은행은 한국은행뿐이어서 외환과는 유일한 수입 수출의 대금 결제를 담당한 창구였다. 미군에 대한 군납업자들의 자금결제도 이곳에서 집중 관리했다.
하루는 당시 수석 부총재였던 박숙희씨로부터 호출이 내렸다. 원래 털털한 성품이신데 방에 들어서자마자 호통이 터졌다. “이놈의 자식, 손님께는 일을 해주는 거지. 돈을 막 먹으면 어떠카노!” 무슨 영문인지 당황불금이었다.
알고 보니 업자가 내게 돈을 주며 일을 부탁했는데 그 일처리를 안 해주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변명 대신에 지갑에서 간직하고 있던 예금 입금증을 꺼내보였다. “이 뭐꼬?” 수석 부총재의 반응. 실은 그 업자가 후에 입금된다면서 자기 외환계정에 상당한 금액을 크레딧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 부탁을 하면서 그는 나에게 봉투를 하나 내민다. 나는 그것을 거절했다.
40에 가까운 건장한 그 양반은 내 거절을 무릅쓰고 나에게 그 봉투를 강요한다. 그러다가 몸싸움이 돼 버렸다. 끝끝내 그는 그 봉투를 내 책상 위에 던져놓고 가버렸다. 하는 수없이 나는 그 수표를 그의 원화계정에 입금했다. 다음에 오면 그 입금표를 건네주지 그런 생각이었다.
내 설명을 들은 수석 부총재가 오히려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외화를 선대해 주는 업무에서는 얼마간의 사례가 뒤따름은 어쩌면 인지상정이라고 할 면도 없지 않다. 그에 따른 약간의 보답은 오히려 예절다운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심경에는 많은 이들이 동조할 것이다.
나는 이따금 직원들에게 이런 일에 대한 주의를 환기했다. 그러나 매일처럼 부정한 금품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설교하는 타입은 아니다. 오히려 평상시 자신을 삼가고 공사를 명백히 가릴 것을 몸소 시범하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럼에도 업자들로부터 향연을 받을 기회도 있게 마련이고 크리스마스 등 대목에 자그마한 선물도 받게 되어 마음 한구석에 부담으로 남았다.
실제 부산시대 즉 외환과장으로 재직하는 기간에 나는 나름대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몸을 혹사시키는 일이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이다. 과중한 은행업무가 주요인이지만 근무시간 후 고객에게 끌려 다니는 술좌석이 또한 큰 부담이었다.
북괴군이 대구 직전까지 다가와 있고 피난살이와 남의 집 다락방에 세 들어있는 꼴이었다. 업무과중, 음주과다로 나는 신체적 몰락의 직전이 아니었던가 돌이켜 본다.
그러다 난데없이 구원의 기회가 나타났다. 새로 부임해온 김유택 총재의 비서과장에 임명된 것이다. 짬도 좀 생기고 괴음의 질곡을 벗어나 편안한 날이 온 줄 알았다.
그런데 이놈의 비서과장이란 직책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낮에는 방문객이 답지했다. 총재의 친구, 은행 등 각 기관의 간부들, 그리고 수효와 빈도에 있어서 타 그룹을 월등 초과하는 이들의 언론기관 관계자들이었다. 나 역시 그들 중 친분을 갖게 된 이가 적지 않았다.
간혹 외국은행 간부들의 내방도 있었다. 그중 한 팀이 BOA 간부들이었다. 재빨리 돌아다닌다 했더니 지점설치 허가를 따냈다. 서울의 외국은행지점 제1호의 BOA 점포는 을지로 2가 한국외환은행 골목길의 건너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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