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고작 서른 중반. 저는 심각한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사실 이 병은 결혼전부터 있던 지병이었으나 출산 후 그 정도가 심각해져 이젠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정도를 말해보자면 학교 다닐때야 가방이나 도시락주머니 준비물 등이나 기껏해야 우산두고 오기가 다였지만 이젠 나이가 들면서 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많아져서인지 내가 챙겨야 할것들이 늘어서인지 점점 더 잃어버리고 사는 것들이 많아지고 그에따른 타격도 커져가고 있습니다.
얼마전엔 요리하면서 달걀을 쓴다며 한개도 아닌 두개나 연이어서 톡~ 껍질을 깨고는 껍데기만을 프라이팬에 올려두고 퍼뜩 정신이 들어 달걀에 행방을 찾아보니 아~ 쓰레기통에서 고이 전사한 나의 달걀들이여. 그 외에도 안경끼고 세수하기, 손에 물건을 쥐고서는 찾아대기, 열쇠 현관에 꽂아두고 외출하기, 머리에 일명 구르프 말고 외출하기, 정장 원피스에 운동화 신고 외출하기, 지갑 두고 버스타기, 양치했나 안했나 곰곰히 생각하다 다시 양치하기, 핸드폰 대신 리모콘 가방에 넣고 나가기 등등 다 열거하자면 끝도 없을 듯 싶네요.
아이를 막 낳고나서는 그 정도가 일시적이긴 하였으나 어찌나 심해 지던지 주변 사람들 이름도 빨리 입밖으로 튀어나오지가 않고 내 집 전화번호를 가르쳐줘야 하는 상황에서조차 생각이 나질 않아 세상에나 친정엄마께 전화걸어 우리집 전화번호를 물어보질 않나, 아이 분유타는 동안은 방금 전 분유를 젖병에 몇숟가락 넣었는지 기억이 안나 다시 타기를 몇번이나 반복. 그나마 정말 아이 안잃어버리고 다니는걸 천만다행으로 여기며 지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겪으며 호르문의 불균형으로 인한 현상이다 또 태어난 아기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다른곳에 미처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져서 그렇다 하기도하더군요. 나름 이 상황을 극복해보려고 메모를 습관하하고 오메가 쓰리부터 각종 비타민을 챙겨먹어보기도 했지만 그러한 저를 더 슬프게 만든 것은 적어놓은 메모지를 잃어버리고, 메모지에 적어두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는 것 그리고 오늘 내가 아침에 비타민을 먹었나 안먹었나 고민해야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도 메모를 습관화하면서 조금씩이나마 나의 실수는 줄어들었고 이때부터 내 머릿속에 지우개를 버리기위한 나의 필살의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가급적이면 물건은 쓰고나서 바로 같은 자리에 갖다두기, 메모 습관화하기, 달력에 각종 행사 적어두기, 핸드폰 알람기능 이용하기, 아이 퍼즐정리는 내가 도맡아 열심히 뇌운동 시키기, 머릿속에서 단어가 빨리 나오질 않아 점점 느려지는 말투 때문에 하고픈 말 미리 머릿속으로 정리해보기, 비타민 정해진 시간에 챙겨먹기 등등.
이런 노력들 덕분인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나아졌고 무엇보다 출산때문에 미루었던 석사과정에서 논문을 쓰면서 녹슨 머릿속에 기름칠이 확실히 되었습니다. 어릴적 엄마가 너도 내나이 되어봐라~ 하시던 말씀들이 떠오릅니다. 우리 삼형제중 한명을 부르기 위해서는 첫째부터 한명씩 그 이름을 다 부르고 나서야 부르고자하던 이름을 찾아부르시던 엄마의 모습, 외출하다 말고 가스불을 잠궜나, 현관문을 잠궜나 다시 확인하기 위해 집으로 차를 돌리던 엄마의 모습들.
그땐 그런 엄마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젠 몸으로 마음으로 엄마를 이해합니다. 주변에서봐도 제 나이에 건만증을 호소하는 엄마들은 있어도 아빠들은 드무네요. 내 몸과 내 일만 건사하면 그 일에만 집중해서 능력 십분 발휘하겠지만 남편에 시댁에 친정에 아이들에 주변지인들에, 나까지 건사하기엔 이미 챙겨야할 사람들과 일들이 너무나 많아진 엄마라는 이름. 어쩌면 그래서 머릿속 지우개가 알아서 적당양은 지워주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엄마의 건망증은 가족 모두가 도와주고 슬퍼해야 할 일이라 생각됩니다.오늘은 이곳 팔로알토의 햇살이 잦아든 바람속에 너무나 따스합니다. 짧은 시간 이지만 커피한잔에 햇볕마사지 받으며 자꾸 뭔가를 잊어버리는 나의 뇌를 훈련시키고 닥달할것이 아니라 잠시 쉬게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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