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금융인 정원훈 남기고 싶은 이야기 - <10> 한미은행
지윤성씨 설립 글로벌 S & L 출범 등
1980년대는 한인은행계 여명기
후임 김원돈 행장 비범함 왕따 가슴아파
■이사진
1982년 말 설립 직후 은행의 이사직에 약간의 추가 변동이 있었다.
초기 이사진은 조지 최, 안응균, 안성주, 안이준, 윤원로, 이창, 잔 안씨 그리고 나 합계 8명이었다. 그 후 김기은, 김익수, 박창규, 홍기태, 정화섭(얼마 후에 노광길씨로 대체)씨의 참여로 총 13명이 되었다.
안씨 성을 가진 이들이 많아서 은행 내에서는 ‘안미은행’(Annmi)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실제 서반아어 식으로 Hanmi를 불러보면 그런 발음이 된다. 또 사대부고 출신이 세 명이나 되었다. 우리는 가끔 그들에게 학연 압력을 삼가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사회는 화기애애한 모임이었으며 나와 집행부를 잘 돌봐주었다. 그러나 나의 은행 관리가 너무 교과서적인 면도 부인할 수 없었을는지 모르겠다.
은행을 연지 몇 개월이나 됐을까. 한 이사회에서 어떤 이사가 불쑥 야릇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 토요일 우리 감사분과 위원회가 골프장에서 회의를 가졌습니다. 그때 행장에 대한 성토가 있었어요” 하는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도 성토란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었다. 그래 “성토란 게 뭐요”하고 반문을 했다. 답변은 있었는데 자상치 않았다. 요는 좋지 못한 비판을 일삼았다 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깠다’란 말을 써주었으면 내 마음을 찔렀을 것이다.
여하간 그 성토의 내용이 무엇이냐 했더니 결국 어물어물하고 말았다. 아마도 그 내용은 가끔 감사위가 골프장에서 회의를 가질 테니 그 경비를 행장이 알아서 처리할 수 없느냐 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곧 이 행장이란 자가 그런 취급을 할 만한 도량의 소유자가 되지 못함을 깨달은 것 같았다.
■Global S&L
1981년 8월 Global Oriental Savings and Loan Association이 문을 열었다.
S&L은 준은행으로 당시 당좌예금 취급이 허용되지 않는 주택자금 융자를 주관하는 ‘주택소유‘라는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해 주는 특수 금융기관이란 기치를 앞세우고 있었다.
Global S&L의 설립자 지윤성씨는 서울에서 국제 여행업계에서 종사했던 이로 그때부터 알고 지내던 터였다. 내가 가주외은을 맡고 있을 당시 은행에 나를 찾아와 은행 경영에 관해 캐묻곤 하더니 급기야 S&L의 설립을 이루어냈다. 아마도 한 4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그런 오랜 기간 준험한 절차와 갖가지 까다로운 요구조건을 다 해낸 그의 끈기에 나는 어떤 두려움까지 느꼈다. 배수진을 친 이민 1세만이 해낼 수 있는 쾌거일까 생각했다.
선사시대부터 우리 배달민족의 장기의 하나가 남의 것을 배워 내 것으로 만드는 모방창조의 정신이다.
Global S&L과 한미은행의 합병교설이 나온 것은 1992년이었다. 그 후 연기, 재개 소식이 교차되더니 결국 1998년 12월 두 금융기관의 합병은 성립되고 Global Saving Bank(도중에 이렇게 명칭이 바뀌었다)는 사라지고 말았다.
■교포은행의 여명기
1980년대는 교포 은행계의 여명기라 할 수 있다.
백인들과 합작했던 Wilshire State Bank(1981년 말 개업), United California Bank(1983년 개업, 후에 Nara Bank로 개칭) 그리고 California Center Bank가 그들이다.
동기라고 할 만한 이들의 등장은 교포 은행계의 경쟁을 격화시켰다. 그러나 호황 밑에서 성장팽창을 거듭한 교포 경제는 교포 은행 발전에 적절한 온상을 제공했다.
신설은행들은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성적을 올렸다.
한미은행은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매년 30~40%의 성장을 기록했다. 1987년에는 점포가 3개, 직원수 100명을 헤아렸다. 나는 은행과의 계약대로 임기 5년을 채운 1987년 4월 행장직을 사임하고 그로부터 약 1년간 이사회가 정해준 대로 고문이란 직함을 받아 하는 일도 없이 은행을 드나들며 날을 보냈다.
■김원돈 행장
얼마 전 서울에서 발령을 받아 감사직을 맡고 있던 김원돈군이 나의 사임 후 행장으로 추대되었다. 김 행장은 내가 한국외환은행에 있을 때 재일 교포학생 특채로 입행한 유능한 인재였다. 그 은행의 간부로서 요직을 역임한 베테런, 온후하고 독실한 은행가로서 품격도 겸비한 인격자였다. 이런 양반을 은행 이사회는 재직 일 년이 되자마자 해직했다.
앞서 내가 고문역을 맡으면서 무의도식의 생활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일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 중 하나가 김 행장과의 교우다. 은행 복도에서 부딪치는 외에 주말 집 뒤 공원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때 그에 대한 나의 추천은 이런 것이었다. “김 행장, 캘리포니아는 세계적 명승지지요. 주말에는 부인을 모시고 차를 달려보세요. 팜스프링스, 샌타바바라는 불과 두 시간 거리. 그러다 기분이 나면 더 멀리 일박여행을 해보세요. 그러면서 눈 보양도 할 겸 스트레스를 푸세요”
그러면 그는 “네, 네” 대답은 하면서도 꼼짝을 안하는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달리 추측을 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능력 부족의 CEO. 그런 누명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어불성설이다. 이런 경우에는 정면 돌파 방법도 있겠지만 김 행장은 간디식이랄까, 무저항 자퇴의 길을 택했다. 대인만이 택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은행이 그에게 자동차를 제공할 때 그는 셰볼레를 택했다. 은행의 경비를 덜어주자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주말에 차를 몰고 구경 길에 나서지 않는 것도 다름 아닌 ‘공품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하는 그의 신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런 사정을 알고 보니 나는 드라이브니 산책이니 권했던 것이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은행 차를 사고 8개월이 지났는데도 그 차의 주행거리 표시판은 500마일을 넘지 못했다. 그런 은행장을 한미는 왕따라는 집단비행으로 쫓아냈다.
그는 은행과의 관계가 끝나자 곧 말도 없이 서울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나하고는 한두 번 연하장을 주고받았었는데, 그는 그 후 2001년 4월 작고했다. 우리 세대에서도 보기 드문 모범인간의 표본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2002년 초이다. 지난날 이 일을 집단비행이라 하였지만 이사회는 그런 자책을 갖지 않을지도 모른다. 법이나 은행 내 규정이 허하는 테두리 안에서 권한 행사를 했을 따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은행의 이사회는 사회에 대하여 제가의 모범을 보여야 할 책임이 있다고 본다. 이것은 이제 중전 은행대열의 선두에 선 한미로서는 더욱 그렇다.
‘강자의 독선에 흐르지 않도록 주의 깊은 자성의 기회를 가끔 가져봄이 옳지 않을까?’
방관자의 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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