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한은행은 남가주에 본점을 둔 한인은행으로는 5번째로 출범, 1991년 6월 영업을 시작했다. 현 새한은행 본점이 위치한 윌셔가 건물 전경.
남기고 싶은 이야기
<11> 새한은행
1988년 한미 떠나 한때 은퇴 고려
한인사회 중간 실력층 대표자들 합류
행장 자격심사 FDIC 제동 걸리기도
1988년 초 나는 한미은행을 떠났다. 그때 내 마음은 이젠 미국 은행계에서 발을 씻고 은퇴생활로 들어가리라 했다. 그 때 내 나이 68세, 해외에 나와서 새 은행을 둘이나 열었으니 그만하면 할 만큼 다했다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한두 달 전부터 은행을 또 하나 해보자고 말을 붙여오던 이들이 내가 사표를 냈다는 말을 듣고 바짝 달려들었다. 그러다 결국 또 다시 주은행국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정을 말하고 한국계 은행을 하나 더 세우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묻는다. 내 친구의 답은 직선적이었다. “Why not?” 결국 또 하나의 은행 설립을 하게 되었다.
■담당변호사
준비 사무실은 Kim & Lim 법률회사에 두었다. Kim & Lim은 LA의 한국계 변호사 그룹.
그들 중 데이빗 홍 변호사는 NYU (New York University)를 갓 나온 기업전문 변호사로 은행설립은 처음이지만 아주 유능한 신진기예이다. 알고 보니 그의 부친이 내가 뉴욕 재직 시대부터 잘 알고 있는 실업가였다.
같이 일을 하면서 나는 홍 변호사와 그의 부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는 부자간 같은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 홍 변호사는 우리말을 못했지만 영문학과를 마친 후 법학을 한 학력을 반영하듯 정확하고 멋진 영어를 구사했다.
방대한 설립 신청서를 몇 주에 걸쳐 밤을 새다시피 해서 작성해 왔다. 삭막한 사무관계 문자이지만 나는 그의 명문에 매혹당해 거침없이 읽곤 했다.
홍 변호사를 대동하고 세 권이나 되는 신청서를 주은행국에 가져가 제출했을 때 나는 담당 책임자인 부은행 감독원장에게 다음과 같이 장담을 했다.
“이 새한은행 설립 신청서는 주로 데이빗 홍 변호사가 작성한 것이오. 나로서는 이것이 세 번째 신청서인데 그의 작품이 너무 훌륭해서 혹시 그럴 경우가 있으면 이 신청서를 견본으로 새 신청자들에게 보여주어도 좋겠습니다.”
아마도 그때의 신청서가 지금도 모범 견양으로 쓰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립 이사회
새한은행의 설립 발기인은 정휘택, 김명준, 김해룡, 한상인, 김일영, 남만휘, 조춘영, 정원훈, 크리스틴 정 등이었다. 준비 도중에 정대웅, 하기환, 윤세황, 김명자, 피터 최, 한동수, 김인평씨가 참여한 대신 조춘영, 한상인, 크리스틴 정씨가 사퇴하여 13명이 이사진을 구성했다.
그들은 나와는 거의 초면이었다. 그러나 한결같이 행장인 나를 지지해 주고 말썽을 부린 적이 없었다. 그것은 한미은행 준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교포사회 입장에서 볼 때 이름나고 요란한 이가 거의 없는 그들은 어쩌면 중간 실력층의 대표자들이라 볼 수 있었다.
그간 교포은행 대여섯 곳이 문을 여는 동안에 은행 설립에 대한 교포 간의 인식이 두터워진 것으로 보였다. 은행 이사라고 은행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에 맡기는 것이 상책이다.
이런 소유와 경영 분리원칙에 대한 인식이 교포사회에 널리 뿌리를 내린 모양이었다. 조용하면서도 확실히 은행 경영을 뒷받침해 주는, 한마디로 성숙한 이사회 또는 능률적인 이사회라 할 수 있다.
최종 주주 수는 120명 정도였는데 그 중 100명이 LA 지역 거주자들이었다. 금액으로는 이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90%를 차지했다. 이것은 후에 북가주에서 탄생하는 아시아나은행의 경우와는 판이한 대조를 이룬다. 그 후 5년이나 지나는 동안 이사들 사이에 다소 간의 불협화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사소한 의견충돌 정도가 은행경영에 지장을 주는 따위는 아니었다.
■경영진
은행 설립 수속의 법률관계는 데이빗 홍 변호사의 열성과 경제조사 관계를 담당한 Bert Rung의 효율적인 준비로 지장 없이 진행되었다. 덕분에 간부 경영진의 합류도 비교적 늦게 이루어 졌어도 무난했다.
우선 administration 담당인 민대홍군 그리고 한참 뒤에 대부담당에 김주학군이 합류했다. 이들은 교포 은행계에서의 베테런들로 은행 개설부터 그 후 경영을 순탄하게 이끌어주었다. 은행장인 나로서도 그들의 능숙한 운영으로 반석 위에 자리 잡은 느낌이었다.
■FDIC의 행장 자격심사
1988년 5월 주은행국으로부터 설립 승인이 났다. 이에 따라 한두 군데 미리 보아둔 영업소 후보지 중 하나를 결정지으면서 그해 7월 FDIC에 예금보험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다.
주정부 인가 당국의 승인을 받은 상태로 연방 감독국인 연방 예금보험공사(FDIC)의 심사를 낙관해도 괜찮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신청을 낸지 얼마 안 돼 갑자기 충격적인 반응이 왔다. 부사장격인 F씨가 내게 전화를 걸어오더니 다짜고짜 폭탄선언을 해댔다. “Mr. Chung, 우리가 보기에는 당신은 은행장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게 좋겠소.” “그게 무슨 말이요,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요?” 하고 나는 반문했다.
그랬더니 그는 내가 과거 행장직을 맡았던 동안 가주은행 때 뿐 아니라 한미은행 시절을 조사해 보았더니 중대한 부실대부들을 남겼다며 “이런 실적을 보인 전직 행장에게 다시 행장직을 맡길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계속 반론을 제기하였다. “당신 말은 알아들을 것 같기도 하오. 나의 운영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책임지겠소. 그러나 당신이 언급하는 것 같은 큰 책임론은 받아들일 수 없소. 어떤 건들을 갖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요?” “그래, 이야기하지. 가주외환은행 때 건은 차치하더라도 한미은행 시절에 취급했던 두세 건의 큰 대부가 부실했던 것은 잘 알고 있지 않소?”
순간 내 머리에 곧 그 두세 건이 떠올랐다. 30만대의 작은 은행치고는 큼직한 대부들인데 사실 한동안 골치를 앓았던 케이스들이다. 나는 즉각 대답했다. “그 건들은 내가 잘 기억하는 것들이요. 그러나 웍아웃(workout) 경과는 나쁘지 않았고, 첫째의 선박 대부 건은 애를 먹었지만 그 후 배가 침몰해 최근 보험으로 대부가 완제됐소. 또 하나, 그림 장사께 나갔던 대부는 내가 있을 때 잡아두었던 부담보 처분으로 이것도 완제됐을 거요. 한미은행은 그 외에는 별반 부실대부라 할 만한 건은 없었을 것으로 보아요. 이런 상태인데 내가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 거요.”
F씨는 그래도 자신의 주장을 거두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우리 결정을 철회할 수 없소. Mr. Chung, 행장직은 단념하는 게 좋을 거요.”
전화를 끊고 나는 생각에 잠긴다. F씨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FDIC의 결정을 내가 이길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 같아 보였다. 그래 허가기관이 ‘노’라고 한다면 그만두지. 나는 행장직을 내놓을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주은행국에서 설립인가와 더불어 행장직을 부여받은 상태였다. 주은행국에 인사라도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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