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의 여름이 무더웠던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는 것은 오히려 두터운 솜이불이었다. 유탄과 파편이 뚫지 못한다고 하여서 밤낮으로 방바닥에 깔려있던 솜이불은 우리의 피난처였다. 공습경보가 울릴 때마다 우리 형제들은 킬킬거리며 한꺼번에 이불속으로 파고 들었고, “웃지 말아라”하시는 아버지의 엄한 꾸중도 소용이 없었다. 우리가 이불 속에 숨어있었지만, 비행기는 한번도 서울시내에 폭격을 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는 겁도 없어져서, 비행기의 소리가 들려오면 우리는 밖으로 나와 인민군이 펑,펑,펑, 쏘아올린 고사포가 만든 구름만이 푸른 하늘에 솜사탕 처럼 떠있는 것을 구경하곤 하였다. 높이 떠서 천천히 북쪽으로 날아가던 비행기는 B29라고 하였다. 헬리콥터는 잠자리 처럼 속이 훤히 보이는 것도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잠자리 비행기’라고 부르면서 낮게 떠가는 조종사를 향해서 손을 흔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작 포탄이 떨어져서 혼비백산을 했던 것은 9월도 끝날 무렵에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할 때였다.
남몰래 숨어있던 옆집의 아릿다운 아가씨가 어느 날 담장을 넘어서 우리집에 왔다. “문자 아버지. 문자 아버지. 유엔군이 인천으로 들어왔다는군요.” “그것을 어찌 알았나?” “미군 방송을 몰래 들었는데, 서울로 곧 들어온대요. 이제 조금만 참으면 되요.” 그 소식은 이웃들에게도 전파되었다.
유엔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은 적에게도 알려진 모양이었다. 죽창을 든 공산당들이 여기저기 방화를 하는가 하면, 포탄이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우리의 머리위를 지난 포탄이 낙산에 떨어져 폭파되는 것도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은 유엔군이 남산에서 돈암동 쪽으로 쏘아댄 대포알이라고 하였다.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바로 그 때에 우리집의 울타리 밖에 포탄이 떨어지고 온 집안의 유리창이 한꺼번에 깨어지면서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한 집 건너 이웃에는 포탄이 지붕을 뚫고 떨어졌다. 앞뒤로 네 개의 포탄이 떨어졌다. 우리는 모두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무도 다치거나 죽지 않았다. 사람들이 파리처럼 허무하게 죽기도 하고, 여간해서는 죽지않는 것이 목숨이란 것도 그 때에 알게 되었다.
밤에는 우리집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낙산에도 불이 났다. 판자촌 동네가 모두 불타올랐다. 사람들의 아우성소리, 찾는 소리, 우는 소리가 우리의 귀에도 들려왔다. 지옥불을 보는 것 같았다. 혹시라도 불이 나거나, 폭격으로 우리의 퇴로가 막히면 큰일이라면서 아버지가 주위를 살피려고 뒷뜰로 나가보기도 하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소풍갈 때에 메고 다니던 가방을 나의 머리맡에 놓아주며 침착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엄마도, 아버지도 없고 너만 있게 될 때에는 이 가방을 메고 모르는 사람이라도 상관말고 어른들을 따라가거라. 오지말라고 하여도 반드시 따라가야한다. 꼭 그렇게 해야 해. 그리고 이 속에는 먹을 것도 있고 돈도 있어요라고 말하거라.” 어머니는 동생들에 대하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8살이었다.
아침이 되었다. 땅이 우릉거리는 소리를 듣고 우리는 밖을 내다보았다. 종로 5가에서 혜화동 쪽을 향해서 탱크들이 들어오고 군인들이 양쪽에 줄을 서서 총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창문을 열고 군인들을 향해서 두 손을 흔들었다. 철모를 벗고 우리에게 인사를 했던 군인은 동양사람이었다. 우리는 더욱 기뻐 소리를 질렀다.
악몽과도 같았던 그 해의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세월이 약이라고 누가 말하였던가.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마음 한 구석에는 그림자 하나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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