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고 곧 미국에 첫발을 디딘 날을 기념하였다. 그날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 이다. 참 어떻게 긴 세월을 잘 이겨내며 왔는지 서로를 격려하며 안아준다. 확실하건대, 예기치 않은 은혜와 축복이 함께 했던 것이다. 다른 문화 속에서 힘들고 지쳐 이게 아닌데 싶을 때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보람도 많았다. 아기가 태어날 때 엄마보다 10 배 이상 더 힘들게 애를 쓴다 하지 않는가. 1.5세 자녀들이 이민 1세 부모와 살면서 학교, 과외생활과 가정에서의 다른 문화를 병행하며 갈등이 왜 없었겠나 싶다. 다른 문화에서 사는 자녀들이 다 흡족하지 않듯이, 자녀들 역시도 때론 부모가 어떤 점에서는 이해 안 되는 점도 있었을 줄로 안다. 이미 다른 문화에 익숙해진 많은 1.5세들을 보며 한국식 미국식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있긴 있는 듯 하다. 그런 아이들에게 안선생님의 꽃 이야기를 해주었다.
1902년에 부인 혜련 여사와 결혼한 안창호선생님은 교육학과 신학을 배워서 민족을 위해 일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미국 유학을 왔다. 당시 그의 나이 22세. 샌프란시스코에서 부인과 같이 청소부로 일하던 그는 한민족의 계몽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였다. 어느날 길가에서 한국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았는데, 싸움을 말리고 이유를 물어보니 인삼판매구역 문제로 시비가 붙어서 다툼이 일어난 것이었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중국사람들을 상대로 인삼장사를 하였는데, 인삼판매구역이 정확하게 구분되지 않아서 이해관계에 따른 다툼이 일어날 소지가 컸던 것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미국인들에게 ‘미개인’이라느니, ‘독립국민의 자격이 없다느니’ 하는 모욕적인 말들을 듣는 재미교포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한다. 그래서 동포들의 집을 찾아 다니며 빗자루와 걸레로 청소하고, 헝겊과 철사로 커튼을 설치하며, 꽃도 심어서 깨끗하고 예쁜 집으로 만들어주었는데, 몇 달이 지나자 한민족의 삶이 변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는 인삼행상들의 영업구역을 평등하게 만들어서 이해관계에 따른 다툼을 예방하고, 인삼가격을 협정하여 출혈경쟁이 없게 하였으며, 계를 만들어서 인삼행상들이 일한만큼 정직한 보상을 받도록 도와주게 된다.
허약한 우리의 삶을 부축해준 많은 유학선배들과 모든 이민 선배들께 감사하며 ‘당신에게 말 걸기’/나호열님의 시와 함께 새해 인사 드린다.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모양새는 모양새대로/다 이쁜 꽃
허리 굽히고/무릎도 꿇고/흙 속에 마음을 묻은/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네게로 다가간다/당신은 참, 예쁜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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