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타임 시작과 함께 봄날이 큰 걸음으로 성큼 왔다. 얼굴과 목덜미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지나가는 것이 봄바람임을 느낀다. 어머니의 손길, 혹은 대지 위에 발 딛고 있는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절대자의 숨결 같다. 긴장이 풀리며 만족감에 젖는다. 부족한 것 없는 밝고 환한 생명의 기미를 느낀다.
봄날이, 봄바람이 있어서 행복하다. 비록 위염으로 속이 쓰리고, 무거운 책을 들다보니 오른쪽 어깨가 좀 쑤시기는 해도 이것이 뭔 대수인가. 세월이 가면 육신이 낡아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며 찌푸리지 말고 살살 다루자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지난 11일 법정스님께서 입적하셨다. 먼 기억을 더듬어 보면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스님께서 잠시 LA에 계실 동안 서점에 자주 들리셨다. 멀찍이 혼자 서서 책 고르는 것을 즐기셨고 책 사는 것도 좋아하셨다. 당연히 말 붙이기도 어려웠다.
스님의 큰 존재감 때문인지 그때의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엄정함, 꼿꼿함, 매사 조심스러움은 그때도 그랬었다. 그 후 간혹 미디어를 통하여 뵙는 스님의 모습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었다. 시간의 흔적으로 오히려 더 맑아진 한 존재를 뵙는 것 같았다.
다비식의 간소함으로 우리 곁에 계셨던, 이것저것 소유하지 않고도 한껏 자유를 누리셨던 큰 스님의 존재가 새삼 크게 부각된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도 얼마나 충만하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지 나를 보아라”고 평생 동안 온몸으로 본을 보이셨다. 따르는 제자들과 흠모하는 사람들을 마지막까지 실망시키지 않고 ‘삶의 스승’으로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셨다.
지금쯤 스님께서는 우주의 소행성 B613에서 ‘어린왕자’의 이웃이 되셨을 것이다. 바하 베토벤 등 평소 좋아하시던 고전음악을 벗 삼아 손바닥처럼 작은 별 숲속 의자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계실 것이다. 해지는 모습을 보려면 단지 의자의 방향만 돌려도 하루에 수십 번 볼 수 있는 작은 별 말이다.
마음에 맞는 친구 ‘어린왕자’가 옆의 별인 소행성 B612에 있어 외롭지 않으실 테다. 법정스님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젊은 시절 이미 스무 번도 넘게 보셨다고 말씀하셨다. 지인들에게 제일 많이 선물로 돌린 책 또한 <어린왕자>였다. 이처럼 평생 ‘어린왕자’를 무척 사랑하셨고 매 해 읽으신다고 하셨다.
그곳에서 단지 근심이 있다면 맑고 환한 날인데도 온갖 잡생각에 짓눌려 사는 우리들 때문일 것이다. 제발 바보처럼 개성 없이, 눈 뜬 장님처럼 그렇게 살지 말라고 스님께서는 여전히 말씀하시고 싶어 하실 것 같다. 아직도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은 탐욕의 올무에 걸려, 혹은 온갖 미디어의 잘못된 선동을 분별치 못하고 남과 비교하며 엉뚱한 자괴감에 빠져 귀하디귀한 한 평생을 낭비할 뿐이다.
스님께서는 허탄한 욕심을 버리면 자유로워진다고, 눈을 크고 넓게 뜨고 정신만 바짝 차리면 정말 이 세상은 이미 천국임을 발견할 것이라고 무수한 말로 설득하셨다. 사리사욕을 몰랐던 어린 시절 즉 ‘어린왕자’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잃지 말라고…
그래도 우리는 갓길로만 여전히 헤매고 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오직 일기일회의 삶을 안타깝게도 낭비하고 오히려 거추장스러워하기까지 한다.
스님께서 수행자들에게 주신 “입 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생각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는 이 말씀은 심사가 들쭉날쭉한 내가 꼭 새겨들어야 될 말씀 같아서 수첩 속지에 적어두었다. 크리스천인 나와 종교적 신념은 다르지만 법정스님은 내가 사는 별 지구로 온 나의 ‘어린왕자’였다.
윤선옥 / 동아서적 대표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