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할머니가 위독하셔서 이틀 동안 함께 돌봐 드리느라…
쉬는 시간에 내게 면담을 요청한 제니퍼가 평소의 활발한 그녀답지 않게 머뭇머뭇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논문을 끝내지 못했다며 하루를 더 달라고 했다. 걱정 말고 다음 주까지 하라고 하니, 내일까지 꼭 제출하겠다고 했다.
수업이 끝나자, 밤 9시반이 넘은 늦은 시각에 그녀는 컴퓨터실로 향했다. 10시 반에 문을 닫으니, 한 시간 가량은 더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서 저런 에너지와 열정이 나오는 것일까. 안타까운 마음 반, 고마운 마음 반으로 나는 그녀에게 필요하면 다음 주까지 해도 좋다고 다시 말해 주고 헤어졌다.
학기가 시작하던 첫 날, 학생들에게 각자 간단한 소개를 하도록 했다. 이름, 교육심리학을 수강하는 이유, 교사가 될 계획이면 앞으로 가르치고 싶은 학년과 과목, 그리고 취미를 말하는 것이었다.
제니퍼의 소개는 장황했다. 묻지도 않은 직업, 가족 상황 등을 덧붙였다. 아이가 여섯인데 막내가 2세, 큰아이가 대학 2학년이라고 했다. 30세도 안 돼 보이는 동안의 그녀가 여섯 아이의 엄마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는데, 파트타임으로 스쿨버스 운전까지 한다고 했다.
“수퍼우먼!이라고 말해 주면서도 나는 걱정이 앞섰다. 중간에 포기하지는 않을까, 수업시간에 졸지는 않을까, 숙제는 해올까, 결석은 얼마나 자주 할까 등등의 선생으로서의 이기적인 걱정이 앞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쓸데없는 기우였다. 학기가 반이 지나도록 아직 한 번도 결석을 안 한 것은 물론이고 매주 제출하는 논문 중 그녀의 것의 내용이 가장 충실하다. 첫 과제물을 채점하면서 나는 제니퍼를 의심까지 했다. 논리정연하고 내용이 충실한 그녀의 논문을 읽으며 혹시 대학생 아들이 써주었나,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었다.
매주 수업이 끝난 후 남아 질문을 해서, 이제는 으레 함께 파킹장까지 걸어가며 이런저런 그녀의 주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큰아들이 대학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것, 두 번째 남편과 이혼했으나 아직 한 집에서 살고 있는데 아이들 교육에 도무지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 등등. 지난 학기에는 역사 강의를 들었는데, 시험 전날 강의 노트가 감쪽같이 없어진 적도 있었는데 분명 전 남편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했다.
가족 이야기 외에도 스쿨버스 운전하며 경험한 아이들 이야기 등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학생의 개인 신상을 캐묻는 것이 실례이므로 주로 듣기만 하면서도, 도대체, 언제 공부를 하는지 무척 궁금했다.
그녀가 지난주에 제출한 과제물에서 그 궁금증이 풀렸다. 자신의 학습 습관을 돌아보며 클래스에서 공부한 학설과 비교해서 평을 하고, 앞으로 교사가 되면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써오는 과제였다. 그녀의 논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나의 학습 습관은 참으로 별나다. … 빨래를 하면서, 부엌에서 요리를 하며,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조각시간을 이용한다고 했다. 막내를 재우고 나서 집안이 조용해지면 드디어 자신의 천국인데, 어떨 때는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피곤한 줄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몰두해서 공부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그녀의 글은 이렇게 끝맺음을 하고 있었다. 하루 만이라도 집안일과 육아 그리고 버스운전에서 온전히 벗어나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공부만 해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형설지공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희망이 있다. 아자 아자, 제니퍼!
이영옥 / 수필가·교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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