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를 만나러 로즈 힐 공원묘지로 급히 차를 몰았다. 암울했던 부산 피난 시절, 소녀는 초등학교 3학년 나의 급우였다. 반세기를 단숨에 거슬러 달려가 동심 속 소녀를 손짓해 불러냈다. 아홉 살 소녀가 방긋 웃으며 내 앞에 요정처럼 나타났다.
속눈썹이 까맣고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갸름한 얼굴에 항상 두 갈래로 단정하게 머리를 땋고 다녔다. 새침데기인 그녀는 말없이 웃기를 잘했다. 눈빛처럼 총명하고 학업에도 뛰어났다. 그녀는 학급 부반장이었다. 선생님이 읽기를 시키면 낭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한자도 틀리지 않고 읽어내는 게 무척 부러웠다. 부끄럼을 심히 탔던 나는 내 차례가 오기도 전에 가슴이 뛰고 목소리가 떨려 읽기를 그르치는 수가 많았다.
음악 시간이나 오락 시간이면 종종 앞에 불려나가 고개를 좌우로 살래살래 흔들며 급우들에게 노래 솜씨를 뽐냈다. 또래에 비해 키가 약간 작은 편이었던 그녀가 조회 때 반장을 대신해서 야무지게 구령을 외치던 기억이 난다. 그날 남학생 반장은 몸이 아파 결석을 했었다.
방과 후에도 그녀를 만나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녀의 집은 우리 동네를 거쳐 가는 곳에 있었다. 나는 부산 토박이들과 곧 잘 어울려 놀았는데 이들은 도도하게 지나치는 서울내기를 곱게 보내지 않았다. 뒤로 살짝 다가가 갈래머리를 당겨보거나 돌을 던지기도 했다.
나는 그녀가 놀림을 당하면 마음이 아팠다. 토박이들이 유행가처럼 불러대던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좋은 고래 고기’소리에 얼굴을 붉히던 그녀를 위해 숫기 없던 내가 용기를 발휘한 적도 있었다.
“야, 너희들 쟤 놀려먹지 마. 우리 반 애야”
큰소리로 외쳐대고는 그녀가 나의 헌신적 용기를 기억해 주기를 은근히 바랬다.
서울 환도가 시작되면서 4학년 초 나는 가족을 따라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그녀는 영원한 아홉 살 소녀로 내 추억 속에 자리 잡았다.
공원묘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장례식장에서 만나 보게 되다니···. 그녀와의 해후(?)는 우연과 우연이 절묘하게 이어지며 엮어낸 결과였다.
대학시절 나는 어느 일간지에서 무슨 경연대회 우승자인 그녀의 인터뷰 기사를 우연히 읽었고 그녀의 부친이 저명한 대학교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뒤 미국에 건너와 살면서 고교동창이 속한 합창단 공연에 갔다가 우연히 그녀의 부친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십여 년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신문을 뒤적대다 또 우연히 그녀 부친의 부음을 들었고 유가족 난에 실린 그녀의 이름 석 자를 보았다. 소녀의 이름 밑에는 손자, 손녀들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성대한 장례식이었다. 뷰잉 순서가 되자 유가족들이 한 줄로 쭉 늘어섰다. 그 곳에, 갈래머리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방황하던 나의 눈길이 소녀의 할머니 같은 여인 앞에서 멈췄다. 유족들이 조객들을 일일이 맞았고 나도 조객들의 긴 행렬에 묻혀 조객답게 목례를 하고 낯선 여인을 지나쳤다.
반세기만에 만난 ‘소녀’에게 말 한마디라도 건네 보고 떠나고 싶었다. 나는 기회를 포착하고 그녀에게 다가섰다.
“OO 씨죠! 반세기 만이에요.”
나를 흘끔 쳐다본 그녀는 곧 고개를 좌우로 서너 번 흔들어 나를 부인했다. 내가 부산 피난 초등학교 이름과 살던 동네 이름을 상기시키자 비로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어머!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하고 계시죠?”
경황이 없는 그녀를 붙들고 딱히 나눌 대화도 없었으므로 나는 의례적인 조의를 표하고 장지를 떠났다. 귀가길이 왠지 허전하고 착잡하기만 했다. 반세기 동안 고이 간직했던 맑고 예쁜 동심 하나를 잃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지워버린 것 같기도 한 묘한 심정이었다.
공연히 추억 속 소녀를 만나 보았나? 백미러 속에서 희끗희끗한 머리에 주름진 얼굴의‘소년’이 씩 웃고 있었다.
황시엽 / W.A. 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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