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꿈속에서 하늘나라를 다녀온 랍비가 있었다. 그가 허락을 받고 낙원에 있는 성전 가까이 가보니, 탈무드의 현인들이라 불리는 타나임이 그 곳에서 생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탁자에 둘러앉아 탈무드를 연구하는 중이었다.
그것을 보고 실망한 랍비는 “이것이 낙원의 전부란 말인가?”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바로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잘못 생각한 것이다. 타나임이 낙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낙원이 타나임 속에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 헤셸이 쓴 ‘안식’의 책속에서 인용한 이야기다.
이처럼 마음속에 낙원을 간직하고 이 세상을 낙원처럼 묘사한 화가가 있었다. 르누아르다. “지상을 신들이 사는 낙원과 같이 묘사하는 것, 그것이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이다”라고 르누아르는 실제로 말했다.
LA카운티 미술관(LACMA)의 르누아르 특별전시회 포스터가 가로등에 걸릴 때부터 마음은 설레었다. 요 근래 가장 좋아하는 화가인 르누아르의 그림은 어디서든 찾아서 보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전시기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한산해진 4월 하순은 르누아르 그림을 감상하기 좋은 때였다.
몇 해 전, 정확히 2004년 핼로윈이었다. 역시 LACMA에서 기획 전시한 ‘필립스 소장전’을 보러 갔었다. 워싱턴 DC에서 LA 미술애호가들을 위해 나들이 나온 것이었다. 르누아르, 모네, 고흐, 세잔, 드가, 피카소, 마티스, 보나르, 마르크, 고갱 등등 지금은 고인이 된 필립스 씨가 ‘자신만의 안목’으로 구입해 소장하고 있던 인상파 그림 53종을 전시하고 있었다.
어둑한 가을저녁, 바람이 몹시 부는 핼로윈 날이라 그런지 미술관 안에는 방마다 나 혼자 아니면 서너 사람이 관람하고 있었다. 모든 그림은 그냥 액자 속의 그림인데 르누아르의 그림 ‘배 위에서의 점심식사’는 그림의 분위기와 열기가 너무도 강렬해서 화면이 살아서 내 앞에 실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림 속의 등장인물과 같은 공기를 숨 쉬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여름날 배 위에서 나누는 교제와 즐거운 식사시간의 기쁨이 온 방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절로 "세상은 참 멋진 곳이야"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그때 르누아르 그림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단번에 깨달았다.
르누아르는 도판(그림책)으로 보는 것 보다는 실물을 봐야 하는 그림임을 알았다. 회화감상의 이유와 유익과 즐거움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지금 당장 미술관의 르누아르를 보라고 권하고 싶을 만큼 르누아르의 실물 그림 한 장이면 단번에 회화의 모든 유익을 깨달을 수 있을 듯 했다.
르누아르 그림은 도판으로 보면 "인생의 진지한 성찰이 부족하여 화려한 모습들만 그리는, 의식 없이 기술만 좋은 작가"라고 쉽게 폄훼하기 쉬운데 실물그림은 정반대의 생각을 갖게 했다.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낙원의 향취가 풍겨나 보는 이를 도취케 했다.
그의 모든 그림에는 인간끼리의 소소한 갈등이 아닌 화기애애한 모습이 등장한다. 피아노 치는 자매, 책 읽는 자매, 사랑이 넘치는 모자간의 초상 등 편안하고 천진한 모습의 인물화가 대부분이다. 그림 속 모든 여성은 풍만함으로, 목욕 후의 정결함으로, 넉넉한 표정으로 마돈나 혹은 비너스처럼 사랑이 충만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세상에는 두려움도 있고 미움도 있고 갈등도 있지만 그런 모습은 제쳐두고 그래도 세상은 화기애애하고 한없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온갖 아름다운 색깔로 멋지게 그려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뭉크처럼 절규하는 그림, 달리처럼 기기묘묘한 꿈같이 초현실적인 그림도 삶의 진실을 표현하여 깊은 공감을 자아내지만, 풍경화든 인물화든 모두 ‘사랑’이 충만한 그림만을 그린 르누아르는 틀림없이 신앙심이 두터우며 지상에서 이미 낙원에 가 있었던 사람이 아닌가 짐작이 된다. 미술관을 떠날 때 내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는 가 스스로 묻고 있었다.
윤선옥 /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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