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랬다. 아주 조금 씩 조금 씩 어두워졌다. 사방은 고요하고 단지 강물이 흐르는 소리만 나직이 들릴 뿐이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 위로 은빛 물고기들이 한번 씩 뛰어올라 단조로운 흐름을 흩트리곤 했다. 쉬임없이 흘러 지금 바라보는 물들은 먼 바다로 갈 것이다. 마치 시작과 끝을 전혀 알 수 없는 시간처럼 끝없이 끝없이 새로운 강물이 흘러내려왔다. 강줄기는 깎아놓은 듯 높은 암벽 등성이인 뒤벼리를 감아 돌아 L자를 그리며 흘러갔다.
아담한 폭의 강이 도시 가운데로 흐르는 운치 있는 도시가 ‘진주’였다. 취학하고 성장한 곳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깨끗하고 반듯한 도시였다. 남강변 모래 퇴적지를 매립하여 만든 신흥주택단지 강가의 주택에서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대문을 나서면 강둑이 촉석루 직전까지 길게 뻗어있었다. 서늘한 저녁나절 둑길을 따라 산보를 했다. 마음이 허전할 때는 강둑에 주저앉아 오래도록 깊은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다.
그 시각 강 건너편 대숲 가장자리 성당에서 저녁 종이 울렸다. 너는 모른다, 너는 모른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뎅뎅뎅 심중 깊숙이 종소리가 퍼졌다. 아무래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저렇게 조용히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른이 된다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까. 종소리는 인간의 일생에 대해 무지하다는 자각을 하게했다.
인생에 대한 의문에 집착한 것은 십대에 들어서자 닥친 아버지의 죽음 탓이었다. 그 후 아늑하고 따뜻한 온실에서의 삶이 끝났다. 삶과 죽음, 다툼과 간섭, 불화, 흩어져가는 가족구성원 등 많은 것이 의문으로 마음 속에 쌓여만 갔다.
책 속에는 뭔가 해답이 있을 거라는 바람으로 책이나 실컷 읽자고 이과반에서 문과대학인 도서관학과로 주저 없이 갔다. 인문학을 두루 조금씩 배웠지만 마음 속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끊임없이 여러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인생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나는 왜 지금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지 알 것이라는 희망은 생겼다.
성년이 되고 아내가 되고 엄마도 되었다. 크리스천도 되었다. 삶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어쩌다가 반짝 있었지만 ‘이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한번 뿐인 삶을 미로를 헤매듯이 허둥대지 않고, 인생의 지도를 들고 느긋하게 걷고 싶은 마음에 성경을 비롯한 여러 책을 여태 뒤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올해 들어서는 둑방에 앉아서 흐르는 강물을 쳐다보던 그 아이에게 자주 말을 건넨다. “얘야, 이것이 인생이었단다.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삶과 미래는 결국 이런 것이었단다”라고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얼른 커서 어른이 되고 싶었던 아이, 어른이 되면 저절로 모든 일들을 알 것 같았던 아이, 닥쳐오는 모든 일들을 곧 바로 해결하고, 결정하고, 나아가 상처받지 않는 담력을 기르고 싶었던 아이에게 건네는 말이다.
힘 있는 어른이 무척 되고 싶었던 어린 아이의 소원이 한바탕 광풍의 세월이 지나간 이제야 절반 쯤 이루어진 셈이다. 희로애락의 정교한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것이 삶이며 그것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난봄은 애통의 나날이었다. 한국에 체류 중이던 시어머님을 급환으로 갑자기 여의었다. 일흔 중반의 연세에 가셨으니 요즘으로 보면 너무 일찍 가셨다. 불효막심한 며느리로서 회한이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항상 기쁜 마음으로 살고자하나 실상은 슬픔의 날들이었다. 초여름에는 아들이 결혼을 한다. 가족 모두 슬픔을 떨치고 친인척과 지인들이 모여 먹고 마시며 즐거운 마음으로 잔치를 벌일 것이다.
효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깨우친 힘들었던 봄날은 가고 애가 탈 정도로 더딘 걸음의 여름이 이제 다가왔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씩 하나씩 인생길에 대해서 배워간다. 공자는 오십에 지천명이라 했는데 오십이 되었건만 나는 아직도 알아가는 중이다.
윤선옥 /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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