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자(의사)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의 아들 피터 버핏이 “인생은 자신이 만드는 것(Life is What You Make it)”이란 책을 출간하였다. 책의 줄거리는 돈 많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지금 그는 음악 작곡가로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은 숟가락 대신 빈주먹으로 태어나는 우리 아이들과는 전설 같은 먼 이야기로 별로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나는 이미 성장한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광활한 만주 땅을 정복한 북방 유목민들이 편안한 삶으로 정착하면서 초원을 달리던 기만민족의 에너지를 상실했다. 우리도 이민초기의 역동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우리 이민사의 물줄기를 총 집대성하여 편집하고 싶었다. 온몸에 피 멍이 들도록 부딪치며 살아온 이민자들의 휴먼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꺼져버린 이민초기의 열정의 불꽃을 다시 점화시키고 싶었다. 마치 대장정의 길을 떠나는 결연한 마음으로 작업에 들어갔다.우선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사진들을 정리했다. 수만 장의 사진을 연도와 날자 별, 각 이벤트, 제목 순으로 분류하는 작업이 가장 힘들었다. 그 다음 디지털 앨범 슬라이드 쇼를 만든 후에 DVD로 구워 완성했다. 드디어 대망의 스펙터클 다큐멘터리 영화 개봉이 박두하는 날이 다가왔다.우선 대가족을 대대적인 공략적인 선전으로 모두 불러 모았다. 마침내 온 가족이 둘러앉은 거실에서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대형 TV 의 화면에서 불꽃이 튀기는 듯한 치열한 이민의 삶을 담은 숨막히는 화면이 계속 바뀌고 종횡무진 움직인다. 배경 화면은 서정시와 같은 아름다운 그림으로 음악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깔았다. 다큐멘터리 시작은 고국을 떠나는 20 대였던 단발 머리의 내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김포 공항 출구를 빠져 나가는 순간이다.
김포 공항의 출구는 고국에서 낯선 땅으로 삶의 뿌리를 옮겨주는 통로였다. 이 통로를 빠져 나오는 순간부터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미끄러지듯이 슬라이드 화면은 이민 첫 출발의 무대로 이동한다. 나는 인턴 수련을 시작한 병원에서 흰 가운을 입은 모습으로 변신을 한다.
나는 진료실에서 백인노인환자의 침팬지처럼 털로 덮인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환자와 마주 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러나 이방인과의 첫 만남으로 이질문명의 충격으로 망연자실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민초기의 주역은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는 5살의 큰 아들과 둘째 아기가 잠들어 있는 유모차를 끌고 있는 시어머님이다.
이민초기의 일등공신은 우리 부부가 레지던트 수련 과정을 밟는 동안 이민전쟁의 일선에서 전투병으로 온 몸을 던져 뒷바라지한 시어머니다. 시어머님은 내가 직장과 아이들 사이를 줄을 타듯이 건너뛰며 공중 곡예사 같은 아찔한 이민의 삶을 지탱해준 후원자였다. 슬라이드 쇼가 끝나고 모두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있다. 두 시간 반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민사를 한데 묶어 압축한 다큐멘터리는 잠시 시간의 감각을 잊은 채 먹먹해졌다. 나의 아들이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며 입을 열었다.“부모님의 이민의 삶은 24시간 밥 먹고 잠잘 시간도 없이 멈추지 않고 가동하는 공장 같았어요. 한인 이민 1세들은 척박한 이국땅을 비옥하게 만든 밑거름입니다.” 윤활제를 바른 것처럼 매끄러운 영어로 하는 아들의 말은 위로인지 칭찬인지 모르겠다. 다큐멘터리는 나와 함께 살아온 모든 친척과 친구들 애환의 이민사를 담은 현대사다 나는 수많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이민사 다큐멘터리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 나는 다시 눈부시게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다음 세대의 슬라이드 쇼를 만드는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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