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조계사에서 참선수업에 참가했다. 미국인 명행스님이 영어로 이끄는 시간이다. 속된 설명이지만 이분도 코넬대를 나오셨다. 생각이 머물지 못하는 Primary point에 대해 말씀하셨다. 숭산스님의 말씀을 전해주며 시작된 짧은 강의다. 그리고 참선에 들었다. 생각이 들면 숨을 가다듬어 생각에서 멀어지라는 조언이다.
스님은 생각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 했다. 다만 우리들이 그 생각에 끌려 슬펐다 기뻤다 성냈다 한다는 것이다. 생각을 바라봄으로써 마음이 그 생각을 조절하도록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자 했다.
잡념을 쫓다 20분이 지났다. 그리고 이어진 스님 말씀 속에서 궁금했던, 생각이 사라졌던 한 순간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행위예술가의 회고전에서 느꼈던 의문이었다.
마리나 아브라모빅의 전시회. 알몸의 모델들이 작가의 작품을 재현하였다. 좁은 통로에 벌거숭이 남녀가 서있고 관객이 그 사이를 지나는 작품이었다.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 나도 줄을 섰다. 두려웠지만 누드 사이를 지나는 느낌을 기억하리라 마음 먹었다. 차례가 왔고, 그들에 닿지 않고자 온 신경을 쓰며 통과했다. 순간이었다. 아무 기억도 남지 않았다. 내가 그 속을 지나 왔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다시 지나가야 하나 갈등했다. 더불어 왜 작가는 옷을 벗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나중에 만난다 한들 도저히 너무 무식해 보여서 물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 모두에 대한 답을 다음 날 저녁 참선시간에 알게 된 것이다.
옛날 선지식들 중에는 도를 묻는 이에게 큰 소리를 지른 분도 있고, 몽둥이로 내리친 분도 있다. 어떤 스님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이들 모두 찰나일지언정 분별을 일으키는 생각이 자리 못할 그 지점을 깨워주었다. 그러나 이들의 가르침을 벽암록이라는 책으로 읽은 내게는 도무지 찰나의 찰나도 ‘생각 없음’ 지점을 만날 수가 없었다. 방바닥을 때리는 순간에도, 팔이 꼬집히는 순간에도 아프다는 소리 보다 여기엔 어떤 답을 해야 하나 머리만 굴릴 뿐이다. 그런 내게 특효약이 마리나의 누드였다. 두 벌거숭이를 지나는 동안 나의 주인은 몸이었고,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마음뿐이었다. 머리가 시켜 판토마임 하듯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분석하면서 다시 마음의 경지를 생각의 경지로 끌어 내리는 우를 범한다. 여하튼 마리나의 알몸은 내게 그 무엇보다 센 주장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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