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월드컵 축구 열기가 한창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15년 전에도 월드컵 대회가 열린 적이 있다. 그 때는 럭비 월드컵이었지만 열기는 지금 못지않았다. 당시 최약팀으로 평가받던 남아공의 ‘스프링복’ 팀이 예상을 뒤엎고 결승까지 올라가 최강팀인 뉴질랜드의 ‘올 블랙’(유니폼이 검다고 붙여진 이름)과 맞붙었기 때문이다.
연장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스프링복은 올 블랙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경기가 끝나자 평소 원수같이 지내던 흑인과 백인들은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며 환호성을 질렀다. 스프링복의 승리는 열심히 뛴 선수들 못지않게 당시 대통령이던 넬슨 만델라의 공이 컸다.
남아공의 인종 통합을 위해 싸우다 1990년 장장 27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감한 만델라는 4년 뒤 사상 처음으로 열린 흑백 통합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는 기적을 일궈낸다. 대통령이 된 후 처음 한 일은 대통령 비서실에서 일하는 백인들을 내쫓지 않고 그대로 둔 채 경호실마저 흑백 인종을 통합해 채용한 것이다.
그리고는 바로 남아공 럭비 팀 스프링복 후원 작업에 들어갔다. 거의 전적으로 백인들 스포츠인 럭비는 흑인들에게는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었다. 스프링복과 외국 팀이 시합을 하면 흑인들은 항상 외국 팀을 응원했다. 만델라가 집권하자마자 이 팀의 이름과 유니폼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것을 만델라가 직접 설득에 나서 막았다.
그리고는 럭비 팀에게 남아공의 새 국가를 배우게 하고 이들에게 가난한 흑인 동네에 가 럭비를 가르치도록 시킨다. 흑백 분열과 갈등의 상징이던 스프링복은 이제 통합과 화해의 상징으로 바뀐다. 1995년 월드컵에서의 승리는 남아공 인들에게는 우리가 같은 국민이라는 사실을, 외국인들에게는 남아공의 저력을 과시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이상은 존 칼린이 쓴 ‘Playing the Enemy’라는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 ‘인빅투스’(Invictus: ‘정복되지 않았다’는 뜻)의 줄거리다. ‘인빅투스’는 19세기말 빅토리아 시대 영국시인 윌리엄 헨리가 쓴 시의 제목으로 넬슨 만델라가 가장 애송한 작품의 하나다. 그는 이 시 마지막 구절인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며 내 영혼의 선장이다”(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를 되뇌며 로벤 섬 교도소의 채석장과 독방에서의 기나긴 고독과 고통을 이겨냈다.
이 영화 만델라 역은 만델라 본인이 “당신밖에는 내 역을 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는 모건 프리먼이 맡았는데 과연 만델라 역을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의 하나는 만델라가 실제로 수감 생활을 한 감방을 백인 럭비 선수들이 둘러보는 장면이다. 남아공을 직접 가 볼 여유가 없는 사람은 이 장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이 영화를 봐야 한다.
자기를 수십년간 박해하고 감옥에 가둔 사람들을 용서할 줄 아는 승자로서의 관대함이나 흑백 통합의 가장 뛰어난 상징이자 수단이 스포츠임을 꿰뚫어 본 혜안은 만델라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범죄 등 숱한 사회 문제에도 불구하고 남아공에서 많은 사람들이 불가피한 것으로 봤던 ‘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거의 전적으로 그의 공이다. 남아공과 여러모로 사정이 비슷했던 이웃 로디지아가 흑인 집권 후 짐바브웨로 이름을 바꾼 후 백인들을 박해하고 쫓아내 엉망이 된 것과 너무 대조적이다.
지난 12일 열린 한국과 그리스 전에서 한국이 통쾌한 승리를 거두자 한국은 물론 세계 어디나 한국인이 있는 곳은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이곳 LA에서도 새벽 4시 반 스테이플스 센터에 2만 명의 한인들이 모여 열광적인 응원을 보냈다. 스포츠가 아니고 무엇이 이 많은 사람들의 밤잠을 이처럼 즐겁게 앗아갈 수 있을까.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의 진리를 실감하게 된다.
민경훈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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