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홍대 앞을 갔다. 마침 토요일이라 벼룩시장이 섰는데, 동네 놀이터의 좁은 공간을 요리조리 이용하여 수많은 보따리 가게를 설치해 놓고 온갖 상품을 선보이고 있었다. 파는 사람들이 대개 대학생들 같아 보였는데, 말이 벼룩시장이지 실제로는 예술시장이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우선 진열 상품들이 옷, 반지, 가방 등으로 다양하지가 않았고, 대개 미술전공 학생들의 기술과 창의력으로 만들진 상품들이었다. 창의력을 얘기하자면, 한 남학생이 두 개만 놓고 팔았던 밥상이 가장 기발했다. 지름 30센티의 허술한 상 위에 ‘1번’이라 크게 쓰여 있었고 값은 만원이었다.
"1번이라니?" 같이 갔던 친구가 한참 만에 "아, 천안함 사건!"이라 외친 다음에야 나도 그 의미를 깨달았다. 천안함을 폭파했다는 북한 어뢰에 쓰인 파란 글씨 ‘1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글씨가 정부 발표의 천안함 사건 진상을 완전히 뒤집어질 수도 있을 만큼 큰 안건이었으니, 그 보따리 장사는 지극히 도발적인 정치시위를 벌이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만들어 왔거나, 만드는 과정을 보이면서 자신들의 작품을 팔았다. 값도 만만치 않았다. 전문인으로서의 자신감을 떳떳하게 보여주며 평가 받는 그들이 의젓하고 자랑스러웠다. 말 그대로 예술시장이었다. 예술시장으로서 아쉬운 게 있다면 여대생 같아 보이는 대개의 고객들이 주로 장신구에만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이 생각났다. 내 주위만 그랬는지 모르지만, 대다수의 우린 미술을 공부하건 연극을 하건 사회와 경제적으로 직접 연결된 장소를 창출해 내지 못했던 것 같다. 사회가 뒷받침해 주지도 않았다. 가정교사라는 아르바이트 말고는. 미술을 했어도 팔기보다는 보여주기, 대학 연극 티켓을 팔았어도 팔과 다리가 닿는 반경 내에서만 팔았다. 요즘엔 인터넷으로 전 세계를 커버하지 않는가(?).
우리 땐 여대생들은 졸업 후 대개 직장은커녕 결혼을 준비했는데, 요즘 여학생들은 졸업 후 직장을 잡지 못할까 봐 학생 때부터 안절부절 이다. 또 요즘엔 가게, 식당, 관공서 등 어디를 가도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있다. 이제 대학은 남녀 불문하고 사회와 경제적으로 직결되고 있다. 그래서 요즘 대학생들은 우리 때보다 독립심이 강한 것 같다. 특히 경제적으로.
벼룩시장을 벗어나 홍대 앞 이 골목, 저 골목을 구경했다. 인파를 보며 놀란 것은 젊은 사람들의 일률적 옷차림과 장신구였다. 여자들은 마이크로 미니스커트 혹은 숏 팬티보다 짧은 바지를 입었고, 그 바지보다 훨씬 큰 백을 들고 10센티 이상의 높은 구두를 신고 다녔다. 거리가 온통 높은 구두 신은 하얀 두 다리의 행렬이었다. ‘쭉쭉빵빵’이라나? 예쁜 여자일수록 얼굴까지 비슷했다. ‘성형미인’이라나? 자신보다 한 뼘이나 큰 그들을 즐겁게 건너보는 남자들은 총각인지, 아줌마인지 성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차림이었다. 행동거지도 그랬다. ‘꽃미남’ 패션이라던가? 이 유행은 서울 어디에서든 보였다. 지하철에도, 버스에서도.
TV의 젊은 연예인들은 같은 옷차림으로, 상대 깎아내리는 말투, 가볍게 반짝이는 유머, 사적 얘기, 고운 피부, 댄스를 자랑하며 이 프로그램, 저 프로그램에 열심히 불려 다녔다. 고액 수입을 공공연히 자랑하기도 했다. 전국 어린이들과 청년들의 꿈이, 재미도 보고 돈도 버는 ‘연예인’이라나?
나는 연예인도 아닌데, 미장원의 미용사가 내 푸시시한 머리카락을 벌레 집듯 잡으며 ‘부의 상징인 머리 결’이 이게 뭐냐고 질책한다. 서울 생활비가 세계 최고 5위권 내에 든다고 한다. 물가도 비싸지만, 사람들이 바쁘게 변하는 유행의 행보를 쫓는 것을 보면 당연하지 않을 수 없다. 아, 그래도 벼룩시장에서 본 젊은이들의 수입은 자신들의 작품처럼 좀 더 창의적으로 쓰여 지겠지.
김보경 / 대학 강사·수필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