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태어나 어떻게 사느냐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언제 어떻게 죽느냐이다. 죽을 자리를 잘 택한 사람은 역사의 영웅으로 길이 기억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역사의 죄인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한민족의 성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조선조 사상 가장 무능한 임금의 하나인 선조는 이순신이 떠오르자 그를 자신의 라이벌로 생각해 여러 번 제거하려 했다. 일본의 위협이 존재하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목숨을 살려뒀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온갖 죄명을 뒤집어 씌워 처형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으로 여러 사가들은 보고 있다. 임진왜란이 한창인데도 왕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잡혀 들어가 혹독한 고문 끝에 죽다 살아난 사건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몇 년 만 일찍 죽었으면 독일 민족 최대의 영웅으로 남았을 텐데 조금 더 살았다가 최악의 인물이 된 사람도 있다. 히틀러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산업을 일으켜 대량 실업에 시달리던 독일 국민에게 먹을 것을 줬고 오스트리아를 통합하는 독일 민족 숙원을 이뤘는가 하면 1940년에는 파리를 점령해 베르사이유 조약의 치욕을 씻었다. 유대인 대량학살 같은 만행도 저지르기 전이었다.
이 때 암살됐더라면 그는 아마도 독일 국민에게는 ‘위대한 독일’을 건설한 애국자로 기억됐을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일찍 죽었더라면 다른 평가를 받았을 대표적 인물이 김일성이다. 부모 모두 기독교 집안으로 어렸을 때 교회에서 오르건 연주자로 활약하던 김일성은 일제의 착취와 탄압에 분개해 만주로 건너가 20대를 항일 유격전을 하며 보낸다.
30년대 말에는 일제의 토벌로 만주에서 설 자리를 잃고 소련으로 건너가지만 그 때 그가 죽었더라면 북풍한설 속에서 무자비한 일제의 공격에 맞서 싸운 그는 애국지사 반열에 올라가기 충분했을 것이다. 후에는 권력에 취해 자신을 유일신과 일본 천황의 합작품으로 생각한 그지만 젊은 시절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내야겠다고 결심하고 목숨을 건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1945년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와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쥔 뒤에는 한민족의 최대 비극인 6.25를 일으킨다. 이 전쟁으로 당시 북한 인구의 1/4인 250만이 죽고 100만 명의 중공군도 목숨을 잃었다. 사망한 남한 사람 수는 100만, 미군 수는 3만3,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전쟁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할 김일성은 오히려 그 죄를 박헌영 등 정적에 뒤집어 씌워 제거하고 권력을 더 공고히 한다. 북한의 권력은 배운 것 없고 빈농 출신으로 만주 게릴라 시절부터 맹목적으로 그를 따르던 25명의 부하와 그 일가족 손에 들어간다.
정적은 후대까지 철저히 죽이고 자기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부하는 대대손손 보살피는 것이 김일성의 특징이다. 그는 6.25로 전쟁고아가 된 수 만 명의 아동을 국가 관리 하에 먹여 살렸다. 부모가 없는 이들에게 김일성은 글자그대로 ‘어버이 수령’이다. 이들이 지금 국가 보위부 등 북한 권력의 실세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북한이 금방 무너지리라 생각했지만 이는 김일성을 과소평가한 것임이 드러났다. 김일성 슬하에서 통치방식을 그대로 배운 김정일 체제 또한 쉽게 붕괴할 것으로 점치는 것은 속단일 수 있다. 김일성 같은 인물이 우리와 같은 시대에 태어나 오래 살았다는 것이 한민족의 비극이다.
김일성 왕조는 인류 역사상 등장한 가장 무자비한 체제이나 권력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는 알고 있다. 한국의 우파는 김일성 부자의 악행을 열거하며 곧 망할 것 같이 기대하고 좌파는 그의 항일 투쟁만 기억하며 민족 앞에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고 있다. 올바른 정책은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에서만 나온다. 오는 25일 6.25 60주년을 맞아 김일성 왕조와 북한 체제를 올바로 보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민경훈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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