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많은 환자들을 대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분들이 있다. 우선은 상황이 특별했던 경우들이다. 너무나 상태가 다급해 식은땀을 흘렸던 분들, 희귀한 병 때문에 치료하는데 길고 암담한 터널의 시간을 같이 통과했던 분들. 치료 결과가 좋으면 기뻐서, 나쁘면 고목의 상처처럼 가슴에 깊이 새겨져서 아리게 기억에 남아 있다.
또 성격이 별나서 도무지 치료에 협조를 안 하고 애를 먹인 분들, 나름대로 이론이 많아서 내 속을 태우신 분들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미운 정이 든 케이스라고 할까. 학창시절 야단을 많이 치던 선생님이 더 기억에 남는 것 같은 이치다.
반면 의사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모범생 같은 환자들에게는 내가 더 잘 해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의사로서 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게 해주시는 분들, 말 한 마디라도 더 해드리고 싶어진다.
부부 간의 정이 특별해서 기억에 남는 분들도 있다. 환자 중 한 노부인이 몇년 전 뇌졸중으로 양로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후 그 남편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걸어서 양로병원을 방문한다. 결혼서약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요즘, 일편단심 열부의 사랑이 감탄스럽다.
할아버지는 병실을 찾아가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부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병원 방문이 항상 즐겁지 만은 않았을 것이지만 매일 걷다보니 할아버지는 건강이 좋아지고 성인병이 잘 조절되고 있다. 열부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나 할까….
어바인에 사는 K씨는 지극한 효성 때문에 생각이 나는 분이다. 빼어난 미모의 중년 여성인 그는 만성 신장병이 나빠져 신장투석을 시작했다. 다행해 의료장비가 발달해 투석은 집에서 딸의 도움을 받아 할 수 있지만, 주중에 거의 매일 해야 되는 치료는 환자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씨는 노쇠한 시부모의 정기검진에 언제나 동행하였다. 공교롭게도 그의 시아버지도 신장이 나빠져 투석을 하게 되면서 양로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환자 본인은 병원 입원을 반대하지만 자녀 부부가 모두 맞벌이를 하니 투석이 필요한 연로한 환자를 집에 모실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그때 K씨가 시부모님을 모시겠다고 나섰다.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도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시부모를 모시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솔선수범하자 십대의 자녀들도 할아버지·할머니의 목욕은 물론 온갖 간호에 동참하였다.
가족들의 지극한 간호에 할아버지는 행복해 하며 건강을 잘 유지하고, 손자·손녀는 성격이 좋아지며 가족을 위하는 마음이 지극해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K씨가 신장이식을 신청해 놓은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콩팥 기증자가 생겨서 마지막 검사를 두 명의 환자에게 하고 있는데 그가 최종 수혜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었다.
K씨의 혈액형과 조직형은 그리 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장 기증을 받을 순서가 되기에는 신청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연락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검사 결과가 나온 후 기적 같이 그에게 콩팥이 주어지고 이식수술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확률이 매우 낮은 일이 현실로 일어난 것이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성경 구절이 떠오르는 사건이었다.
환자들은 내 인생의 스승들이다. 그들은 사람은 영원히 행복할 수도 없고 영원히 불행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행복은 물질에 달려 있지 않고 얼마나 남을 사랑하고, 의리를 지키며, 부모를 공경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무엇보다 생명은 돈으로 약간 연장은 할 수 있으나 살 수는 없다는 것을 날마다 가르쳐 준다.
김홍식 /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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