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후줄근한 모습으로 나타나 언제쯤 일거리가 있느냐고 묻는다. 월요일 오전에 오라고 했다. 11시15분이 되니 나타났다. 함께 밴을 타고 가서 서른 박스의 책을 실어와 정리하니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책을 박스에서 꺼내 같은 표지의 책들끼리 모아서 정리할 때 눈썰미가 있어선지 한글을 몰라도 정확하게 정리한다. 차근차근 책장이 접혀질까 조심하며 깔끔하게 일을 한다. 박지성이 쓴 책 ‘더 큰 나를 위해 나를 버리다’의 책 표지에 박힌 박지성 사진을 보고는 그를 무척 좋아한다며 반가운 눈길로 책을 이리저리 훑어본다.
일자리를 제공하는 이들이 대부분 한인들인지라 ‘빨리빨리’ 라는 우리의 성격을 잘 알아서 그런지 눈치 있게 게으름 피우지 않고 일을 했다. 주인이 일하는 만큼 보조를 맞추어 열심히 했다.
일거리를 더 주기 위하여 창고정리를 시작했다. 지난 몇 해 동안 하루하루가 바쁘기도 하고 힘에 부치기도 해서 미뤄뒀던 가게 창고를 청소하기로 한 것이다. 못쓰게 된 책장과 선반들과 상점장비들을 망치로 부수어서 쓰레기통에 날라다 버렸다. 2시간 반 정도 하니 일이 끝나서 40달러를 줬다. 보통은 4시간 일하면 시간당 10달러씩 40달러를 지불한다.
올해 들어서는 책 박스를 나르는 것도 힘에 부치고 한꺼번에 책을 좀 많이 정리하고 나면 팔도 쑤셨다. 가게 주변에서 일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서성이는 히스패닉 청년에게 도와달라고 청했다. 그래서 한달에 두 번 책이 많이 들어오는 날 알베르토가 나를 도와주게 되었다. 20대 후반이며 멕시코가 고향인 히스패닉이다. 가톨릭 신자로 8가 근처에서 형님가족과 함께 산다고 한다.
LA 코리아타운 대형마켓에서 일했는데 멕시코를 다녀오니 고정 일자리가 없어져버렸단다. 올해 초부터 코리아타운 인력시장이 있는 곳에서 일손 찾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용노동자가 되었다.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 일거리가 있다고 한다.
어느 날 오후 3시경 얼굴이 해쓱하고 풀죽은 모습으로 와서 일거리가 없느냐고 묻길래 “너 아직 점심 못 먹어 배고프지”하며 점심값부터 주었다. “점심 먹고 청소라도 같이 하자”고 말했더니 한시간쯤 지나서 왔다. 청소를 하는데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한다. 점심 값으로 낮술을 마신 모양이다. 일을 중단하게 하고 20달러를 쥐어주며 가서 쉬라고 하니 안도의 표정으로 간다. 그 주 일주일은 일거리가 하나도 없었단다.
알베르토는 매일 먹을 양식인 음식과 맥주 값만 있다면 지금으로선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요즈음은 여의치가 않은 것이다. 알베르토뿐 아니라 지금은 모두가 고단한 세월을 건너는 중이다. 조금 형편이 나은 한인들의 가정도 알베르토만큼 고민스럽다.
’깡통 집’을 붙잡고 사기당한 듯한 허망함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은 파산을 선택한 지인이 있다. 새롭게 살 곳을 찾아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다는 소식이다. 이런 유례없는 불경기가 닥치지 않았다면 결코 깨어지지 않았을 단란한 가정에 시련이 닥친 것이다.
내 집 마련을 하고 한 숨 돌리려는데 실직을 하게 된 케이스도 있고, 비즈니스 운영이 어려워진 자영업자도 있다. 돈을 모아 집을 장만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빚더미에 눌려버리게 되는 화를 자초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알베르토처럼 혈혈단신이라면 배짱이라도 편하겠지만 부양가족이 있는 가장들의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컴퓨터와 인터넷 혁명’ 도 불황에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인터넷 혁명은 역사적으로 큰 획을 긋는 사건임에 분명하다. 이처럼 대단한 변혁의 시기를 하필 우리 모두는 우울하게 보내게 된 것이다. 알베르토와 일하면서 나도 덩달아 이런저런 시름에 잠긴다.
윤선옥 /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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