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에서 15년간 순종황제의 측근으로 일한 일본관리 곤도 시로스케 회고록 ‘대한제국 황실비사’에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의 날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마침내 1910년 8월 29일에 병합협약이 테라우치 통감과 이완용 총리의 손에 의해 체결되었다. 한사람도 다치지 않고 평화와 영광 속에 국경이 철폐되었고 한국 황제폐하는 그 통치권을 우리 천황 폐하에게 양도하였으며 사방 1만 5000리의 영토와 2,000만 민중은 우리 천황의 보살핌 아래 현대 문화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당시 궁중의 모습은 매우 평온하고 조용한 가운데 단 한차례 어전회의가 열렸을 뿐이다. 어전회의는 오후 2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대조전 흥복헌에서 열렸다. 어전회의는 약 한시간만에 끝났으며 마침내 왕 전하께서 이완용 총리에게 한일병합협약 체결 전권위원장을 내리셨다.”
과연 그렇게 평온했을까? 육군대신 데라우치는 그해 5월 새 통감으로 부임하며 이미 모든 경찰권을 위임받았고 군대까지 해산당한 조선에 일본 헌병 2,000명을 증원시킨 다음 친일파를 앞세워 순종을 강압, 8월 22일 조선통감 관저에서 비밀리에 한일병합을 체결하고 29일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공포한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화가 나기 시작하고 고종이 서거하자 조선황실의 법도대로 진행되던 장례절차가 갑자기 일본식으로 바뀌며 다수의 조선 대신들이 삼베 두건 대신 일본식 의례복을 입고 있는 사진을 보면 책을 집어던지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 책은 일본인 시각으로 본 100년 전 그날 모습을 전하는 유일한 책이랄 수 있다. 일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유약하고 무능한 고종과 술과 여자만 탐하고 무위도식했던 왕족’으로 조선왕실을 깎아 내리며 한일병합의 당위성을 고집하려 했던 점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조선 왕조의 비장한 최후가 눈에 보인다.
조선왕조 마지막 왕녀 이해경은 회고록 ‘나의 아버지 의친왕’에서 고종과 의친왕에 대한 평가와 기록이 왜곡되고 조작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또 소설이지만 사실에 기반을 둔 권비영 장편소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에서는 ‘조선의 마지막 핏줄이 게다를 신고 아오리를 걸치고 학교에 가는 옹주의 모습에 한탄하는 고종의 부정을 볼 수 있다.
문화재연구가 이순우가 최근 출간한 ‘통감관리,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하늘재 발행)에는 이완용이 테라우치 통감에게 조선을 팔아넘긴 장소인 조선 통감관저의 위치를 현재 예장동 소공원으로 추정하며 현재 아무런 흔적 없이 빈 의자 몇 개가 놓여있다고 전한다. 몇 년 전 그 현장에 표지석을 세우자는 움직임이 잠시 있었을 뿐이다.
표지석 하나 세우기가 왜 그리 어려운가? ‘불편한 진실’이라고 은폐하지 말고 경술국치의 현장이라는 표지석을 세우고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반성의 자리로 삼아야 한다. 구한말 관리가 외국에 매수되어 나라를 팔아넘긴 100년 전 그날 그 장소의 표지석은 오늘날 정치인들의 의지가 흔들릴 때 ‘부정부패 매국노로 역사에 남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 역사 교과서 왜곡이나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억지에 대처할 방법을 모색하고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잡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부끄러운 과거를 발판으로 각자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삼성전자는 소니를, 현대자동차는 캠리를 싱싱 앞질러 10년쯤 달리다보면 우리가 아시아 역사를, 세계를 이끌어가는 더욱 발전한 나라가 될 것이다.
민병임/뉴욕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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