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왕이 바뀔 때마다 치러야 하는 가장 큰 일의 하나는 명나라의 고명을 받는 일이었다. 당시 중국은 천하의 중심이었고 중국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조선 왕은 왕으로서의 정통성이 없었다.
중국의 고명을 받지 못하는 왕이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보여주는 실례로 광해군을 들 수 있다. 후궁 사이에서 14명이나 왕자를 낳았지만 정비에게서 낳은 적자가 없었던 선조는 고심 끝에 광해군을 후계자로 택했다.
그러나 정작 명나라에서는 그가 서자 출신이란 이유로 고명을 거부하며 세자 책봉에 관한 진상 파악을 위한 조사단까지 파견한다. 집권 내내 정통성 시비에 시달린 광해군은 지는 해인 명나라와 뜨는 해 청나라 사이에 줄타기 외교를 벌이며 전쟁을 피한 외교적 성과에도 불구, 인조반정에 의해 제주도로 쫓겨나 쓸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 후 40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중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놓여 있으며 후계자 선정도 그 동의를 받지 못하면 할 수 없는 나라가 있다. 바로 자주와 주체를 입버릇처럼 되뇌는 북한이다. 지금 북한 경제는 엉망이며 민주당 집권으로 기대를 걸었던 미국과의 관계는 부시 때보다 더 나쁘고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함께 대가 없는 퍼주기였던 햇볕정책도 끝난 상태다. 현실적으로 북한이 매달릴 곳은 에너지와 식량의 거의 전부를 대주고 있는 중국밖에는 없다.
중국 입장에서 보면 북한은 껄끄러우면서도 쓸모 있는 존재다. 우선 미국과 일본, 한국 등 해양 세력의 대륙 진출을 막아주는 일차적 방파제다. 북한이 무너지면 중국이 바로 이들 세력과 맞상대를 해야 한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한 것이나 중공이 6.25때 대군을 보낸 것은 이념이 어떻게 바뀌건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변함이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또 지금 중국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옛 만주 지역인 요녕, 길림, 흑룡강 등 소위 동북 3성의 개발이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이 붕괴해 대량 난민이 발생하거나 무력 충돌 사태가 벌어지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한다. 게다가 이들 지역에서 만든 물건을 수출하고 필요한 물자를 수입하기 위해서는 북한 동해안의 항구 개발권을 얻는 것이 긴요하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김정일로서는 지금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안정적인 권력 승계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절대 권력을 자식에게 무사히 넘겨주기 위해서는 중국의 도움이 꼭 필요하고 이를 위해 김씨 왕조 수립과 중화 인민공화국의 건국이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이라는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을 떠올리면 지난 주 느닷없는 김정일의 중국 방문 미스터리가 자연스레 풀린다. 그가 처음 들른 지린의 위원 중학교는 김일성이 15살 때 처음 항일 운동과 공산주의 활동을 한 곳으로 김씨 왕조의 시발점이나 마찬가지고 하얼빈은 김일성이 첫 애인과 도주 생활을 한 곳으로 동북 항일연합군 기념관이 있는 김씨 왕조의 성지다. 김정일이 병든 몸을 이끌고 이곳을 찾았다는 것은 그의 이번 중국 방문 포인트가 어디 있는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김정일은 중국의 인정과 원조가, 중국은 북한의 안정과 항구가 필요한 지금 김정일과 후진타오가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평양까지 노구를 이끌고 찾아온 카터를 찬밥 신세로 만든 것은 미국 도움 없이도 우린 까딱없다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한 것이다.
김씨 왕조를 지키기 위한 김정일의 노력은 그렇다 치고 조선 시대보다 더 퇴보한 북한의 입장을 앵무새처럼 대변하면서도 자신을 ‘진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정신 상태를 갖고 있는 것일까. 통일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지는 느낌이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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