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창으로 내다보이는 푸른 하늘 멀리 플라타너스의 잎들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다. 옆집 탐 네 느티나무가 늙어서 맥없이 쓰러진 후 가려졌던 풍경이 드러난 것이다. 붉은 기와지붕 너머 높이 솟은 나무의 흔들림이 경쾌하다. 설거지하면서 한번씩 올려다본다. ‘아, 저건 나의 나무야’라고 혼잣말을 한다. 그리곤 오래도록 물끄러미 쳐다본다.
웨스트민스터 차임이 은은하게 들려온다. 마냥 넋을 잃고 하늘과 기쁨에 떠는 무수한 잎들을 쳐다보는 나를 깨운다. ‘클라라 부인’이 또 15분이 흘러갔음을 알리는 소리이다.
’클라라 부인’은 최근 나의 친구가 되었다. 그전에는 어느 집의 창고에서 한동안 잠을 자고 있다가 선교기금 모금을 위한 거라지 세일에 나왔다. 경쟁자보다 훨씬 높은 돈을 걸어서 내 차지가 되었다. 새 시계를 사는 것에 비하면 턱없는 헐값이다. 큰 시계의 울림을 가까이 하고 싶었다.
20여 년 전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하고부터 종소리가 은은한 커다란 시계를 거실 한 쪽에 세워두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실용적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평소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실용성을 따지는 우리 집에는 제대로 짝이 맞는 가구가 없다. 부서지지 않은 것을 버릴 수가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식탁 의자 등 거라지 세일에서 사서 20년 이상 쓰고 있는 가구들이 제법 된다. 아이들은 우리집은 대학생들이 아무렇게나 사는 기숙사 하우스 같다고 말하곤 한다. 조금 정돈된 상태는 미션스타일이라고 불러준다.
단지 시간만 보면 되는데 비싼 사치품 같은 그랜드파더 시계를 산다는 것은 남편이나 나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코스코 매장에 시계가 전시되거나 지나가다 시계가 눈에 들어오면 요모조모 꼼꼼히 살펴보면서 언젠가는 사겠지 하고 꿈을 꿨다. 간혹 혹시나 하고 남편의 의향을 물어보면 시간만 알려줄 뿐인 시계에 거금을 들인단 말인가 하며 딱 거절이었다.
시계방 아저씨의 수리와 정비 후에 시계는 정확하게 가고 있다. 독일제인 시계의 속은 견고하여 수명이 대략 50년에서 70년이란다. 운이 좋으면 적어도 30년 이상은 나와 함께 갈 동무가 될 것이다. 외양이 할아버지 같지 않고 단아한 아줌마 같다. ‘클라라 부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앞이마에 “Tempus Fugit”이라 쓰인 띠를 두르고 있다. 라틴어로 ‘시간은 날아간다’는 뜻이다. 내가 움직이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지라도 시간은 쉬임없이 부지런히 일하며 속절없이 날아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오늘도 ‘클라라 부인’은 정확하게 움직였다. 거실 책장 옆에 서서 15분마다 우아한 목소리로 시간을 알려준다. 시간은 아주 정확하게, 냉정하고 빠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일깨운다. 6피트가 넘는 키에 몸매가 우아한 ‘클라라 부인’ 곁에 의자를 두고 앉는다. 급히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 시간들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 세상에 태어나서 꼭 해야 될 일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는 지구라는 위대한 대지에서 한 평생을 보내기 위해 왔다. 한 때는 무한한 애정을 받았고 또 이 세상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리라는 열렬한 기대도 받았다. 하지만 결국은 세상의 짐 덩어리밖에 되지 못한 자괴감에 허우적거리기도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헤어날 길 없는 중병이라는 사형선고를 받고 맥없이 쓰러진다. 가엾은 우리들의 보편적인 개인사이다.
생명이 있으니 아직은 희망은 있다. 나 자신에게, 가족에게, 이웃에게 부드러운 미소로써 선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타인에게 따뜻한 온기를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클라라 부인’은 다정한 음성으로 나에게 용기를 북돋워준다. 뎅 뎅 뎅 뎅…
윤선옥 / 동아서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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