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뉴스가 없는 주는 없지만 지난 1주 사이 한반도와 관련해 의미 있는 뉴스가 여러 개 터졌다. 그 중 제일은 물론 김정일의 셋째 아들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북한은 이와 때맞춰 30년 만에 노동당 규약을 “주체형의 맑스-레닌주의 당”에서 “김일성 동지의 당”으로 고쳤다. 작년 4월 개정된 북한 헌법은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창시한 김일성이 조선의 창건자이고 조선의 시조”며 “수령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모신다고 돼 있다.
북한은 더 이상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고 김일성주의 국가며 김일성의 자손이 아니고서는 권력의 근처에 갈 수 없음을 못 박은 것이다. 나라 이름을 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고 김일성 왕국으로 바꾼 것만 빼고 북한은 이제 분명 김씨 조선이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어떤 왕도 지금 북한의 김씨 정권과 같이 절대적이고 무자비한 권력을 휘두른 적은 없다. 시도 때도 없이 바른 말 하는 선비들의 상소에 시달려야 했고 연산군처럼 왕권을 강화하려다가는 폭군으로 몰려 쫓겨나기도 했다.
왕의 이름을 내걸고 북한처럼 시조를 신격화하고 혈통을 신성시하며 대를 이은 충성과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한 체제는 일본 천황 파시즘밖에 없다. 유럽 전체주의 사고에 물든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만세일계’의 천황을 간판으로 내걸고 안으로 민주주의를 짓밟고 밖으로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야만성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북한의 시조 김일성은 청년 시절 일제의 군화 발에 신음하는 조선 민족을 구하겠다고 총을 잡고 산 속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 그런 그가 세운 나라가 결국은 일본 천황제를 그대로 본받은 꼴로 전락한 것이다. “모방은 가장 진실 된 존경의 표현”이란 말이 있다. 그렇게 본다면 북한이야말로 가장 친일적인 나라다.
이런 시대착오적이고 봉건적인 작태가 진행되고 있는데도 소위 한국의 ‘진보’들은 귀를 찢는 침묵을 계속하고 있다. 진보주의는 원래 모든 사람이 신분이나, 이념, 종교에 상관없이 차별받지 않고 다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생각이다. 지금 북한은 김일성 일가와 가까운 사람들 외에는 배를 채우기조차 힘들고 집안에 소위 ‘반혁명분자’가 있으면 3대, 4대 사돈의 팔촌까지 핍박을 받는 곳이다. 그럼에도 북한 사회를 비판하는 ‘진보’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
지난 주말 지구의 반대쪽 브라질에서는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열렸다.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유력시 되는 딜마 루세프는 원래 전형적인 운동권 출신으로 한 때 총을 들고 게릴라 활동까지 한 인물이다. 그러던 그가 좌파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깨닫고 제도권으로 들어와 집권당의 후보까지 된 것이다.
현 대통령이자 루세프의 후원자인 룰라 역시 빈민가 구두닦이 출신으로 과격한 노조 지도자였으나 대통령이 된 후에는 시장주의자로 전향, 복지 프로그램과 함께 시장 친화적인 정책을 펴 ‘영원한 미래의 나라’로 조롱받던 브라질을 경제 강국으로 키웠다. 그의 집권 8년간 2,100만 명이 빈곤에서 벗어났고 3,500만 명이 중산층 대열에 진입했다. 퇴임을 앞둔 그의 지지율은 80%에 이른다.
밑바닥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국민 절대 다수를 빈곤에서 구한 그야말로 진보의 영웅일 것 같은데 정작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진보’는 별로 없다. 경제를 살리고 빈곤을 구제하는 최선의 방책이 시장 경제를 탄탄히 하는 것이란 룰라의 실례를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한반도에서 하늘이 열린 개천절인 지난 3일 독일은 통일 20주년을 맞았다. 유럽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던 독일이 사실상 아시아 유일의 분단국가인 한국의 건국일에 통일을 이뤘다는 것은 묘한 우연의 일치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20년이 지나도 한반도의 통일이 이뤄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통일이 문제가 아니라 진보와 퇴보를 구별하지 못하는 가짜 진보가 ‘진보’ 행세를 하는 한국의 앞날이 걱정이다. 가짜 진보(일명 가보)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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